[천자 칼럼] '라면王'과 새우깡

입력 2021-03-28 18:20   수정 2021-03-29 00:13

신춘호 농심 창업주가 부산에서 장사를 처음 배울 때였다. 6·25전쟁으로 늦게 고교에 입학한 그는 방과 후 국제시장과 자갈치시장에서 일했다. 그러다 쌀값이 계절마다 달라지는 걸 눈여겨봤다. 가을 추수 때 사들여 이듬해 봄에 팔면 수익이 쏠쏠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쌀 상태가 변질되는 바람에 큰 손해를 봤다. 이때 품질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

대학 졸업 후 맏형 신격호 롯데 창업주를 돕다가 라면 사업을 시작할 때도 그랬다. 서울에서 롯데공업을 설립한 1965년 라면시장은 삼양식품 등 7~8개 회사가 선점하고 있었다. 후발주자인 그는 물량 공세 대신 품질 향상을 통한 차별화로 승부를 걸었다. 그래서 기술 개발에 온 힘을 쏟았다.

품질제일주의로 시장 진입에 성공한 그는 ‘짜장면’과 ‘소고기라면’의 인기 덕에 전국 유통망을 확보했고 1971년엔 수출에도 나섰다. 1975년 ‘농심라면’ 개발 이후 회사 이름을 아예 농심으로 바꾼 그는 1985년 라면시장 1위에 올랐다.

공전의 히트작 ‘신라면’은 글로벌 식품회사로 올라서는 지렛대가 됐다. 이젠 알프스 융프라우에서 아프리카까지 100여 개국에서 농심 라면을 맛볼 수 있다. 지난해 매출 2조6400억원 중 해외 부문만 1조1200억원에 이른다.

그의 네이밍 감각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평소 품질과 브랜드를 강조해온 그는 독창적인 제품명을 많이 지었다. 자신의 성이기도 한 ‘매울 신(辛)’을 활용한 신라면부터 유기그릇 산지 ‘안성’과 전통 탕을 결합한 ‘안성탕면’,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합성한 ‘짜파게티’ 등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국내 최초의 스낵 ‘새우깡’도 그가 지었다. 당시 4세 막내딸 신윤경(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의 부인)이 아리랑을 ‘아리깡 아리깡 아라리요’라고 부른 데서 착안했다. 고급 스낵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팀이 기계 옆에 가마니를 깔고 쪽잠을 자며 트럭 80대 분량의 밀가루로 실험을 반복한 일화도 유명하다.

그가 “우리 손으로 개발한 기술은 우리의 지적 재산”이라며 평생 중시한 품질제일주의는 농심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그제 92세로 타계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당부도 “거짓 없는 최고의 품질로 세계 속의 농심을 키워라”였다. 그 뿌리가 젊은 날 쌀장사에서 체득한 ‘농부의 마음(農心)’과 맞닿아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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