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박지원은 '열하일기'로 8촌 형을 구했다

입력 2021-04-01 17:46   수정 2021-04-02 03:23


1780년의 조선은 겉으로 보기에 평온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았고, 일반인에게 알려진 역사적 대사건도 없었다. 하지만 그해 정조는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진하(進賀) 특사를 파견한다. 《열하일기》로 유명한 연암 박지원도 특사 일행을 따라 중국에 간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오랑캐’라 부르며 멸시했던 조선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대청 외교 방향을 바꾼다.

중국 근세사 전문가인 구범진 서울대 교수는 《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에서 ‘1780년의 열하’를 배경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외교 관계에 관한 역사적 장면을 풀어냈다. 조정의 반청(反淸) 여론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 후 140년 만에 건륭제에게 특사를 보낸 정조의 결단을 높이 평가한다. 진하 특사를 이끌었던 박명원이 청나라에서 불상을 선물로 받아와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 반발을 불러일으킨 ‘봉불지사’ 사건을 자세히 소개한다. 박명원의 8촌 동생인 박지원이 박명원을 어떻게 변호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과거 중국에선 황제의 생일을 만수절(萬壽節)이라고 불렀다. 청나라의 만수절은 국가적으로 기념해야 할 중요한 날이었다. 건륭제는 자신의 만수절 잔치를 북경 자금성이 아니라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열었다. 박명원 일행은 1780년 음력 8월 1일 북경에 도착했고, 건륭제는 직접 열하로 이들을 초대했다. 파격적인 대우였다. 정조의 진하 특사들은 청나라의 2~3품 고위 관리들과 나란히 앉아 만수절 축하 공연을 관람했다. 건륭제로부터 많은 선물도 받았다.

청나라 예부에선 건륭제가 베푼 성대한 연회와 박명원 측이 받은 선물의 목록을 아무런 사전 상의 없이 마음대로 작성해 조선에 별도 문서로 보냈다. 청나라에서 사신들을 얼마나 융숭히 대접했는지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청 예부에선 박명원 일행이 티베트 라마승 판첸을 만나 금불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사신들이 “성스러운 스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축복의 은택에 흠뻑 젖었다”고 적었다. 박명원이 보낸 장계엔 없는 내용이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박명원은 봉불지사 사건에 휘말렸다. 저자는 여기서 “공식 수행원 신분도 아니었던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묘사된 장면들을 직접 ‘목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이었을까?”라고 묻는다.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통해 박명원을 구명했다는 것이다. 박지원은 “‘성스러운 스님’ 운운은 예부가 제멋대로 적어넣은 것이고, 박명원은 줄곧 머리를 곧추세우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선물로 받은 불상을 놓고 일행이 얼마나 고심했는지 전하고, 박명원이 불상을 결코 자신의 뜻으로 갖고 온 게 아니었다고 밝힌다. 저자는 이런 점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청나라 여행 견문록이자 박명원을 변호한 기록이라고 해석한다.

책 말미에선 1780년 조선의 대청 외교와 21세기 한·중 외교를 병치한다. 1780년 정조와 건륭제가 서로 성의와 은혜를 주고받은 우호 행위가 양국 관계의 증진과 격상을 이끌었듯, 지금의 한·중 외교 역시 각자의 전략에 따라 호혜적 관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1780년 이후 청에 다녀온 조선 사신 일행의 경험과 견문은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해졌다”며 “조선의 성의 표시가 거듭될 때마다 청 또한 그에 상응하는 우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지금 우리는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원수로 여기지는 않는다”며 “1990년대 초에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며 최소한 경제적 측면에서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여길 만큼 친밀한 관계가 됐다”고 덧붙인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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