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태평양과 대서양을 누빈 ‘전설의 선장’이 데이터 바다의 주역이 될 ‘청년 선장’들을 만났다.
1969년 낡은 어선 2척으로 한국 원양업의 대항해 시대를 개척한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86) 얘기다. 김 회장은 2일 대전 KAIST 본원에서 이광형 KAIST 총장과 ‘인공지능(AI)의 미래를 말한다’를 주제로 대담했다. 미수(米壽·88세)를 바라보는 노(老)경영인은 젊은 공학도들 앞에서 AI를 화두로 150분간 삶의 철학과 혜안을 풀어냈다.
이날 대담은 김 명예회장이 지난해 12월 “한국의 미래는 AI 혁명에 달렸다”며 KAIST에 사재 500억원을 기부한 것을 계기로 마련됐다. “대항해 시대에는 선박이 주역이었지만 데이터의 바다에서는 AI가 미래”라는 게 그의 신념이다. 김 명예회장은 이날 대담에서 “시대는 바뀌었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어장을 찾고,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향해 도전하는 본질은 같다”며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AI 연구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어 달라”고 독려했다.
김 명예회장은 원래 약정액 500억원을 10년간 연차별 계획에 따라 분할 기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날 첫해 약정금액 26억6000만원과 2년차에 송금하기로 한 51억5000만원을 합쳐 78억1000만원을 지난달 한꺼번에 보냈다고 공개했다. ‘속도’에 대한 조바심에서다.
그는 “AI라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데 규모가 작아서는 미래가 없다”며 “첫째도, 둘째도 속도전이 가장 중요한 만큼 석사과정 연구생을 현재 40명에서 100명 이상으로 늘리고 유명한 교수들도 빨리 초빙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KAIST가 특허 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도록 스피드(속도)를 내 달라”고 덧붙였다.
최근 들어 누구나 AI를 외치지만 정작 이 분야 인재를 육성할 기초가 없는 현실도 예리하게 짚어냈다. 김 명예회장은 “자동화 설비 조금 갖다놓고 AI 기술을 갖췄다고 얘기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라며 “정작 가르칠 선생 하나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지난해 4월 은퇴 선언을 하며 남긴 메시지도 “변화의 시대에 먼저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고, AI를 이해하지 못하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 명예회장은 2018년 야타베 다케시가 쓴 《미래IT도해, 지금부터의 AI비즈니스》 등을 직접 번역해 임원들과 공유하기도 했다.
2019년 4월 퇴임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AI 인재 양성과 기술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동원그룹 계열사 동원산업은 한양대에 30억원을 기부해 국내 최초의 AI 솔루션센터인 ‘한양AI솔루션센터’를 설립했다. 2년 전 동원그룹 차원의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전 계열사에 로봇 프로세스 자동화 프로젝트를 도입했고, 최근 대표이사 직속 AI 전담조직도 신설했다.
“AI가 뇌를 해킹하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잘 만들고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학자들의 윤리와 도덕의식에 관한 교육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적 감각(이기심)을 이기는 이타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융합형 인재가 더 중요해지는 시기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는 “본업을 버리면 망하고, 본업만 해도 망한다는 명언이 있다”며 “자기만의 전문 분야 연구와 함께 다른 분야에 대한 연구와 관심,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보라/박종필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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