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에 대한 학술 연구는 1970년대 초반 북유럽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인간 대상의 사회심리학 연구 성격이 강했지만, 이제는 실험동물을 활용한 뇌과학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사회심리학 연구는 현상을 서술하고 중요한 이슈를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현상이 일어나는 기작은 실험동물을 통해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러 현상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힘으로써 근본에 존재하는 기작을 규명하는 것이 과학의 중요한 목표다. 이를 위해서는 동물을 이용해 인간 대상으로 할 수 없는 실험을 해야 한다.
학폭은 피해자로 하여금 사회적 고립을 느끼게 만든다. 대개 한 명의 주동자와 그를 따르는 학생들이 몇 명 있고, 나머지 대부분 학생은 침묵하는 방관자다.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고 심리적인 괴롭힘도 동원된다. 학폭의 정도가 심해지면서 동조자가 늘어나며, 피해자는 소위 ‘왕따’ 상태에 빠져 심한 사회적 좌절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결과 피해자는 자존감을 잃고, 패배감과 우울증에 빠지고, 사회성이 심하게 위축돼 복종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자살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이는 물론 학창 시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직장폭력이나 사이버폭력 뉴스에서 학폭과 비슷한 사례를 자주 보게 된다.
특히 학습·기억 능력이 심하게 떨어진다. 뇌의 해마 부위에서 학습·기억의 형성에 필요한 단백질은 물론 학습·기억을 형성하는 뇌회로 기작인 시냅스가소성도 저하된다. 사회성이 위축된 생쥐는 전전두엽 신경의 절연막이 감소해 신경신호 전달에 이상이 생긴다. 전전두엽은 사회성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위다. 사회적 좌절 스트레스를 경험한 동물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피질로 이어지는 스트레스 호르몬 축의 만성적 기능 항진에 의한 스트레스 호르몬 증가를 겪는다.
언젠가 핀란드 헬싱키대에 초청 강연을 간 적이 있다. 강연 후 식사 중에 교육제도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핀란드 학생들의 생활 만족도가 높다는 기사를 읽고 부러워한 적이 있었고, 한국에서는 모든 학생이 똑같은 목표를 놓고 경쟁해 행복지수가 매우 낮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래서 핀란드 교육제도의 어떤 특성이 학생들이 편안히 학교생활을 하도록 만드는지 물었다. 동료 교수로부터 핀란드 교육은 학생 개개인의 능력과 취향에 맞춰 각자 타고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돕는다는 답을 들었다. 이런 교육철학은 북유럽 문화 전반에 배어 있는 ‘얀테의 법칙’과 관련이 깊다.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거나 지나친 야심을 품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배려, 평등, 겸손의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저절로 학폭이 생기기 어려운 문화를 형성했다. 한국의 교육, 나아가 사회 전반에도 ‘얀테의 법칙’이 필요하지 않을까?
신희섭 < 前 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장·UST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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