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한 백신 확보에 실패한 정부가 국민을 대상으로 ‘러시안룰렛’(목숨을 건 내기)을 하는 것과 같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창원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은 8일 정부의 아스트라제네카·옥스퍼드대 코로나19 백신 접종 재개 움직임에 이같이 지적했다. 정부는 혈전 발생 논란이 있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을 재개할 방침이다. 유럽의약품청(EMA)이 혈전 발생 가능성을 인정하긴 했지만 백신 접종의 이익이 위험을 능가한다고 판단한 게 근거다. 하지만 일각에선 “백신 확보에 실기한 정부가 대안이 없다 보니 문제가 있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히고 있다”는 반발이 나오고 있다.
“위험보다 이익이 커”
코로나19 예방접종대응추진단은 이날 “이번 주말에 일부 보류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 재개에 대해 결정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방역당국은 내부적으로 사실상 접종 재개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추진단은 “EMA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과 일부 특이한 혈전 발생의 인과성 검토 결과를 발표하며 백신 접종 이익이 위험을 상회하므로 접종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재확인했다”고 덧붙였다.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 역시 이날 “질병청이 이번주 여러 혈전, 백신 전문가와 EMA 결과를 검토하고 접종도 재개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추진단은 지난 7일 유럽 각국에서 접종 후 희귀한 혈전 사례가 연이어 보고되자 이번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 계획을 보류했다. 이로 인해 국내 특수학교 종사자와 유치원·초·중·고교 보건교사, 감염 취약시설 종사자 등 14만2000여 명의 접종이 뒤로 밀린 상황이다. 만 60세 미만 3만8000여 명의 접종도 중단됐다.
백신 부족 우려에 교차 접종 검토
정부가 부작용 위험에도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 재개를 결정한 배경엔 백신 부족이란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의존도가 높다. 첫 백신 접종이 시작된 2월 26일 이후부터 지난 7일까지 111만8000명의 백신 접종자 가운데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은 사람은 90만3000명으로 전체의 80.8%다. 상반기에 도입 예정인 물량도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가장 많다. 정부가 2분기 도입할 예정인 백신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이 433만4000명분으로 화이자 백신 도입 물량(264만 명분)의 1.6배 수준이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이 중단되면 정부의 접종 계획이 한참 늦춰질 수밖에 없다. 권 장관은 “상반기 예정된 1200만 명 대상 백신 접종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방역당국은 백신 부족 등으로 접종에 차질이 빚어지면 교차 접종도 검토하기로 했다. 김기남 코로나19 예방접종대응추진단 예방접종관리반장은 “일부 연령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2차 접종이 제한될 경우 교차 접종을 포함한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1차 접종자에게 화이자 또는 모더나 등 다른 백신으로 2차 접종을 하겠다는 의미다.
“연령별 접종 계획 세워야”
전문가들은 당장 접종 재개를 결정하기보다는 최소한 연령별 접종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기석 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유럽 국가와 같이 연령별로 접종 계획을 세분화해야 한다”며 “젊은 층은 (코로나19로 인한) 치명률이 워낙 낮은데, 혈전이 생긴다고 하면 백신을 맞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방역당국은 내달 중순으로 예정된 65세 이상에 대한 백신 접종 시기를 앞당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혈전 발생 위험이 있는 젊은 층의 접종 시점을 늦추고, 코로나19 위험군의 접종을 앞당기겠다는 것이다.
연구 데이터가 나오는 하반기 이후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접종 일정을 미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어차피 백신 접종이 다른 국가에 비해 늦어졌기 때문에 아스트라제네카 백신만 맞아야 한다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며 “접종 일정을 하반기 이후로 미뤄야 한다”고 했다.
이종구 서울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뇌 혈전은 질환 자체가 위중한 질병”이라며 “발병 가능성이 낮다고 해서 쉽게 보면 안된다”고 했다.
김우섭/이주현/이선아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