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경제 세계사] '신사의 나라' 영국, 젠트리는 진짜 신사일까

입력 2021-04-12 09:01  


신사를 뜻하는 젠틀맨은 양복에 넥타이를 맨 점잖은 남자를 연상하게 하지만 본래 영국의 신분 계급 중 하나였다. 작위가 있는 귀족 바로 아래의 중간계급을 분류할 때 영지 규모가 가장 작은 사람이 젠틀맨이었다. 어원은 옛 프랑스어로 귀한 집안 출신을 뜻하는 ‘gentil’이다. 젠트리는 공작·백작 등의 귀족과 평민 사이에 위치했다. 젠트리는 귀족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가문의 휘장을 쓰는 것이 허용되었다. 지주뿐 아니라 법률가, 성직자, 의사 등 전문직과 부유한 상인까지도 이 범주에 포함되었다. 실질적인 사회 엘리트였으며 역사적으로 영국의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대가 흘러 젠트리의 계급적인 개념은 희석되고, 이와 거의 동의어로 쓰인 젠틀맨이 귀족을 포함한 상류 계층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현대의 젠틀맨은 ‘교양 있고 예의 바른 남성’을 지칭하는 일상용어다.
농업국가에서 상공업국가로 성장한 영국
젠트리는 16세기에 본격 등장했다. 중세가 끝나가던 당시 영국에서는 토지 소유와 신분 계급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권력층인 상층 귀족이 쇠퇴하고 농업과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중간 계층이 전면에 부상한 것이다. 15~16세기에 일어난 1차 인클로저운동은 양모를 공급할 양을 사육하기 위해 지주들이 농지나 휴경지, 공동경작지 등 자신의 땅에서 농민을 내쫓고 울타리를 친 것이다. 농사지을 땅을 잃은 농민들은 실업자로 전락하고 도둑이나 거지가 되기도 했다.

인클로저운동은 중세 장원경제의 붕괴와 새로운 사회·경제 주역의 탄생을 알린 변곡점이었다. 농업 위주였던 영국은 16세기 들어 해외 식민지 건설, 해상무역과 모직물 산업을 통해 상공업 국가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인클로저운동으로 가장 득을 본 계층이 젠트리 같은 신흥 지주와 요먼으로 불린 부유한 자영농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농지에 울타리를 치고 목장을 만들었다. 요먼은 토지를 사들여 젠트리로 신분이 격상되기도 했다. 토지를 통해 부를 축적한 젠트리는 의회에도 진출해 영국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1688년의 명예혁명과 이듬해 권리장전의 주역이 젠트리였다.

젠트리와 요먼의 주도로 18세기 후반 농업기술 발전과 가축 품종 개량에 의한 농업혁명도 일어났다. 18세기에 들어 농지를 4개로 나눠 ‘밀→순무→보리→클로버’ 등의 순으로 윤작하는 이른바 ‘노포크 공법’이 개발되었다. 사료작물 덕에 휴경기를 둘 필요없이 1년 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농법이었다. 이로써 단순재생산이던 농업이 확대재생산으로 변모했다. 이런 혁신은 18~19세기 초에 2차 인클로저운동으로 귀결되었다. 지주들은 토지 활용도가 높아지자 공동 경작지였던 곳까지 울타리를 치고 소유권을 강화했다. 농지를 임차해 농업 노동자를 고용하고, 농작물을 생산하는 농업 자본가도 등장했다.
지주 vs 자본가, 곡물법 논쟁이 불붙다
1760년대에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영국의 주력산업이 모직에서 면방직으로 옮겨갔다. 무역과 방직업으로 큰돈을 번 신흥자본가가 등장했다. 영국의 시민혁명을 주도한 젠트리 중 지주에서 자본가로 변신한 이들은 산업혁명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진척될수록 서로 이해가 상충되어 지주와 신흥 자본가 간 마찰이 커졌다. 지주는 농산물 수입 제한으로 곡물 가격이 높게 유지되는 게 이득이지만, 자본가는 관세를 낮춰 곡물이 싸게 수입될수록 유리해진다. 밀 같은 곡물 가격이 뛰면 노동자들의 생계비 부담이 커져 임금 인상 압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1660년 제정한 곡물법을 통해 수급이 조절되었다. 곡물법은 영국 내 곡물 가격이 낮을 때 수입 관세율을 높여 수입을 억제하고 곡물 가격이 비싸지면 관세율을 낮춰 수입을 늘림으로써 곡물 수급과 가격 안정을 꾀하는 제도였다.

1793~1815년 나폴레옹전쟁과 대륙봉쇄령으로 곡물 가격이 뛰자 지주와 자본가의 갈등이 더 첨예해졌다. 당시 영국 의회는 귀족과 젠트리 등 지주계급이 다수였다. 당연히 의회는 곡물 가격을 높이는 쪽을 선호했다. 그러나 1815년 전쟁 종료 후 밀 가격이 급락하자 의회는 곡물법을 개정했다. 개정 곡물법에서는 일종의 수입 금지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1816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의 여파로 흉작이 겹쳤다. 노동자의 생활은 점점 악화되었지만 곡물 가격은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또한 전쟁 종료 후 제대 군인들까지 대거 노동력으로 공급되어 임금만 더 내려갔다. 이 때문에 영국 의회와 경제학자들 사이에 곡물법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데이비드 리카도는 당시 곡물법을 맹렬히 비판한 경제학자였다. 그는 곡물 가격이 높게 유지되면 토지 이용 수요 증가로 지대가 올라 곡물 가격이 더 높아진다는 ‘차액지대론’을 폈다. 리카도는 곡물법 폐지와 비교 우위에 따른 자유무역을 설파했다.

반면 토머스 맬서스는 개정 곡물법을 옹호했다. 그는 낮은 곡물 가격은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고 곡물 수입 의존도를 높여 위험하다고 봤다. 산아제한과 인구 억제를 염두에 둔 맬서스의 논리는 지주계급에는 복음이었다.

자본가와 노동자에게 고통이었던 곡물법은 1846년에야 폐지되었다. 1845년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으로 100만 명 이상이 굶어죽고 난 뒤였다. 이는 보호무역에서 자유무역으로, 지주 중심에서 신흥자본가 중심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이후 농업의 중요성이 낮아지고 자본가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지주의 위상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젠트리라는 중간 계급은 부르주아로 불린 신흥 자본가, 법률·교육·의학 등 전문직, 상업과 금융에서 성공한 이들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NIE 포인트
① 귀족 등 상류층이나 빈민 등 하류층과 달리 중산층이 두터울수록 민주주의 등 정치가 안정되고 사회가 발전하는 이유는 왜일까.

② 영국의 곡물법 파동, 미국의 남북전쟁 등 지주와 신흥 자본가 사이의 대립에서 대부분 산업화 세력이 승리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③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개발되어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유입되고 기존 저소득층이 떠나는 현상을 뜻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젠트리’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까닭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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