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2월 1일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접주인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무력 봉기를 일으켜 1년 여간 정부 및 일본군에게 무력 저항을 하다 1894년 말 진압당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동학란’,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등의 다양한 명칭을 가졌다. ‘동학교도인가’ 또는 ‘농민인가’란 주체 문제, ‘혁명인가’ 혹은 ‘민란인가’란 성격 문제, 결과와 역사적인 의미 등 상반된 평가로 인해서다.
‘난(亂)’은 적대적 관계였던 위정자들과 양반 유림,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서학(천주교)과 위정척사파, 개화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또한 조선 지배의 욕망을 가졌던 청나라와 일본의 시선이다. ‘전쟁’은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해 무산대중의 계급투쟁으로 평가한 용어로 북한 정권이 사용했고, 남한에서도 일부가 수용한다. 반면 ‘혁명’은 평등과 자유를 기치로 내걸고 체제의 전면적인 변화를 추진했고, 자유를 속박하는 외세에 항전한 동학과 농민의 견해를 대변한 평가다.
이 봉기는 어떠한 배경과 목적을 갖고 추진됐을까? 조선은 후기에 들어서면서 ‘백성들의 보호와 관리’라는 국가 기능을 상실해가고, 백성들은 몇 차례에 걸친 전쟁, 이상기후로 인한 흉작과 전염병의 창궐 등으로 대참변을 여러 번 겪었다. 그 와중에도 성리학적인 세계관과 신분제도로 무장한 양반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가렴주구는 한계점을 넘어 19세기 초에는 ‘관서민란(홍경래의 난)’, ‘임술민란’ 등이 발생했다. 백성은 불만과 저항의지를 표출할 수 있고, 희망찬 미래와 새 세상을 추구하는 미륵신앙, 후천개벽 등의 민간신앙과 ‘정감록’, ‘격암록’ 등 예언서들에 빠져들었다. 일부 지식인 사회도 부국강병론과 개방, 서양문물의 도입 등을 요구하며 민권의식의 고양과 사회체제의 개혁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인내천(人乃天)’이란 평등의 가치관과 이상 세계의 모델을 제시한 동학이 등장하자, 서학과 서양문물에 배타적인 농민들은 이 자생 신앙에 열광했다(신복룡,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전라도 일대에서 성장한 동학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1864년 3월 사교로 몰려 창사자인 최제우가 사형당했다. 한편 1875년의 운양호 사건 이후에 일본과 청국을 필두로 미국 독일 등의 서구열강들은 서양문물을 보급하는 한편 상업, 광업, 농업 등의 경제적인 침탈을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자국 상품을 판매하고 쌀 등의 자원을 수탈하면서 조선경제와 농가를 붕괴시키는 중이었다.
세력을 확장한 동학교도들은 1892년 11월에는 삼남 지방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면서 최제우의 신원을 복원하고, 동학을 인정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전봉준 등은 서학을 비판하고, 외국상인들을 추방할 것을 결의했다. 1893년에는 각지에서 상경한 대규모 교도들이 서울의 궁궐 앞에서 상소하면서 본격적으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학은 개혁과 봉기의 이론을 만들었고, 주도할 조직망과 군사력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했다. 마침내 전봉준 등의 남접은 1894년 2월 10일 전라도 고부에서 악행을 자행하는 신임 군수인 조병갑을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대부분의 사회 운동과 정치 변혁은 상항에 따라 단계적으로 변화하고 확장된다. 초기 봉기는 고부관청을 습격한 후 군수를 효수했고, 비록 행동강령은 전주성을 함락한 후 한양으로 진격한다고 했지만 지역 민란의 수준을 넘지는 못했다. 그런데 사태 수습을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더 심하게 탄압하고, 분노를 유발하는 악행들을 자행하자 전봉준은 다시 4월에 탐관오리들을 숙청하고 ‘보국안민(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의 의지를 담은 창의문(倡義文)을 선포했다. 불과 10여 일 만에 근처 지역에서 농민들까지 포함한 1만여 명이 집결하자 전봉준은 ‘척왜양’를 표방하고, 한양을 공격해 정부의 고위관리와 세력들을 죽인다는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이어 정부군과 황토현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전주성을 무혈로 점령했다. 체제 위기를 두려워한 정부는 외세 개입의 위험성을 우려하면서도 청군에게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대기하던 일본군도 톈진(천진)조약을 빌미로 대규모로 군대를 파병했다. 이 무렵 최시형 등 북접 세력들은 고수했던 무저항 종교운동을 포기하고, 전봉준의 무장 노선을 지지하면서 전국의 동학교도에게 이 봉기에 참여할 것을 포고했다.
승승장구하던 전봉준의 군대는 관군을 선제공격하다가 패배했고, 초토사인 홍계훈은 이를 계기로 탐관오리의 숙청을 약속하면서 봉기군의 해산을 요구했다. 전봉준은 그동안 제기했던 격문, 강령, 개혁안 등을 정리해 ‘12개 폐정개혁안’을 정부에 제시했다. 즉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리고,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하며,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하게 벌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줄 것 등의 혁명적인 내용이었다(유영익,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 결국 ‘전주화약’이 성립됐고, 동학 농민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포(包)를 설치하고 접을 조직해서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심지어는 황해도 평안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봉기의 근원지인 전라도 일대는 젊은이들의 대다수가 동학에 입교할 정도였다. 동학 농민군은 ‘도인(道人)과 정부가 서정(庶政)을 협력한다.’는 전주화약의 조항에 근거해 마을마다 집강소를 설치한 후 각종 개혁을 주도했다. 정부 관리의 힘이 미치지 못해 일종의 ‘해방구’적인 성격도 띄웠다.
이처럼 동학은 체제 변혁의 명분과 이론을 제공했다. 동기를 유발하는 동시에 혁명적인 개혁안을 구체적으로 만들고 군사력 등의 인적 자원을 제공하면서 동학화한 일반 농민과 공동으로 정부와 전면 대결했다. 여기에 ‘척왜양’ 이라는 구호와 강령을 비롯한 일본군과 벌인 본격적인 전투는 봉기의 성격과 위상을 더욱 혁명의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그무렵 일본 정부가 이 사태의 발발을 예측하고 대비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척왜’ 구호가 등장했을 당시 이미 농촌까지 침투한 일본 스파이의 보고로 봉기의 성격과 진행과정 등을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때문에 청군의 상륙 소식을 듣자 즉각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의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7월부터 동학의 요구한 내용에 접근한 갑오개혁에 착수했다.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30년 가까이 충돌하던 일본과 청나라는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은 비참한 전장이 됐다. 일본의 승리가 확정되자 전봉준과 손화중 등 동학 농민군은 9월 중순에 ‘척왜(斥倭)’를 선언하며 2차 거병을 했다. 불과 한 달 만인 10월 말에 삼례역에만 11만의 동학군이 집결했으며, 손병희가 지휘하는 북접군도 남하했다. 드디어 동학 농민군은 공주의 우금치에서 정부·일본 연합군과 6, 7일 동안 40∼50회에 달하는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1만여 명 가운데 500여 명만 탈출하는 대패배를 당했다 이어 다른 지역에서 김개남 부대, 손병희 부대가 패배했고, 강원도와 황해도 등에서도 동학군은 패배했다. 12월 30일 밤 전봉준이 포로로 잡혀 서울로 압송되면서 군사행동은 끝났고, 다음해 4월 그가 손화중 등과 함께 처형당하면서 1년 여에 걸쳐 전투와 개혁정치를 실현하던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다(박맹수, 『사료로 보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혁명을 놓고 다양한 평가들이 있다. 조선의 사상과 신분 체제를 뒤흔든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행위의 주체와 성격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의 운명은 물론 동아시아의 신질서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평가로는 전술상의 문제점, 남접과 북접의 갈등을 비롯한 청일전쟁을 일으켜 일본의 조선 지배를 본격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 등이 있다.
하지만 ‘민족사’란 장기적이고, 통일적인 관점에서 보면 긍정적인 면들이 많다. 서학(천주교)을 통해 소개됐고, 갑신정변으로 실패한 개혁의지와 민권사상을 일반 백성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 재발견했고, 그 요구를 원(原)정체성에 뿌리를 둔 민족종교와 연결해 정신과 체제를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외세의 실체를 생활 속에서 자각했으며, 저항과 타도의 대상으로 각인시켜 의병투쟁, 독립전쟁 등으로 계승됐다. 무엇보다도 생존권의 요구와 일회성의 저항을 넘어 평등과 보편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군사행동 등을 전국적으로 개진한 체험은 민족의식이 탄생하고, 근대국가, 근대국민으로 성숙하는 전기를 만들었다.
동학농민혁명은 가치와 자유를 위해 정부군 및 일본군과 승산 없는 전쟁을 펼쳤던 민족사의 유일무이한 혁명이다.
20개월 동안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을 집필하면서 매번 아쉬움과 탄식, ‘만약 이렇게 됐더라면(what if)?’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가정이 불가능하지만, 역사학은 가정이 필수적이다. ‘역사학은 미래학’이기 때문이다(윤명철, 『역사는 진보하는가』).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민족사의 유일무이한 혁명, 동학농민혁명' 이야기를 끝으로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보여주신 뜨거운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