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태 칼럼] '소주성' 실패자의 KDI 行

입력 2021-04-12 17:49   수정 2021-04-14 07:52

역대 대통령의 첫 번째 경제수석비서관은 학자 출신이 많았다. 보수 정부든, 진보 정부든 다르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 때 박승, 김영삼 정부 때 박재윤, 이명박 정부 때 김중수가 그랬다. 김대중 정부도 학자 김태동을 첫 경제수석으로 앉혔다.

정권 철학을 잘 이해하는 전문가를 내세워 개혁을 밀어붙이겠다는 의지, 관료에 의존하지 않고도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하지만 자신감은 이내 현실의 벽 앞에 무너졌다. 초대 수석 대부분이 단명으로 끝난 게 방증이다. 김태동이 3개월로 가장 짧았고, 김중수 4개월, 박승 10개월 등이었다. 단명 이유는 조금씩 달랐겠지만, 현실감각 부재가 컸다.

가장 단명한 김태동 수석은 교체된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재벌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지만, 인사에 관여했던 장성민 전 의원(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은 얼마 전 사석에서 “경제 위기 상황을 헤쳐나가기에 학자로는 역부족이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물러난 자리는 대부분 경제관료로 대체됐다. 현실 경제에 정통하지 않은 책상물림으로는 정책을 힘있게 펴기 어렵다는 걸 인정한 결과였다.

문재인 정부 역시 초대 경제수석으로 홍장표 부경대 교수를 등판시켰다. 경제학자들조차 “누구지?” 할 정도로 생경한 인물이었다. 지난 대선 기간 문재인 후보의 공부모임(정책공간 국민성장) 을 주도했던 한 멤버는 “공부모임에 한 번 나왔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중소기업 정책과 관련해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을 펴 ‘저 친구 누구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홍장표는 무명이었던 것과 달리 존재감만큼은 남달랐다. 그가 직접 국내에 맞게 이론적 기초를 세웠다는 ‘소득주도성장’론을 내세워 최저임금 인상 등을 밀어붙였다. 결과는 다 알다시피 참담했다. 가계소득 양극화는 더 벌어졌고, 자영업자 청년 등 약자층이 극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역효과를 내면서 결국 1년 만에 중도 하차했다.

그의 자리 역시 관료 출신으로 채워졌다. 훗날 이 정부의 실패 요인을 분석한다면 ‘소주성’이라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 주요 패착 중 하나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그가 이번엔 대한민국 최고 싱크탱크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새 원장으로 낙점을 앞두고 있다. 이틀 후인 15일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KDI 원장을 지낸 원로들이 반대 성명서를 냈고, KDI 내부 연구진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 4·7 재보궐선거 참패에도 불구하고 임명은 강행될 분위기다.

그가 보편적 식견을 갖고 있다면 KDI 원장행은 스스로 접어야 마땅하다. 무엇보다 KDI는 정권의 시녀가 아니다. KDI가 지난 50년간 권력의 부침에 상관없이 국가경제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은 정권의 입김에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장론이 우세한 국책기관이었지만 DJ·노무현 정부 때도 KDI의 연구 자율성은 보장됐다. DJ 정부 때 강봉균, 노무현 정부 때 김중수 현정택 등 정권과 크게 무관한 인사들에게 KDI를 맡긴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KDI는 전통적으로 내부 논쟁이 치열한 조직이다. 연구자들 사이에 반골 기질도 강하다. 국책연구기관임에도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여럿 냈다. 실패한 정책 책임자를 내려보내 연구 방향에 간섭이라도 하는 순간, KDI에는 사망선고가 내려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가고 싶다면 그냥 조용히 지내는 게 좋겠다. 이 정부 초기에 임명된 최정표 원장도 재벌 연구로 정부와 코드가 맞는 학자이지만, “외부 분위기에 신경쓰지 말라”며 스스로 연구에 일절 간섭하지 않아 KDI 내부 평가가 좋은 편이다.

jtch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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