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전철과 독서

입력 2021-04-13 17:40   수정 2021-04-14 00:10

내가 전철을 처음 타본 것은 고등학교 때 서울에 무슨 시험을 보러와서였다. 우리를 인솔하는 선생님과 함께 당시 고속버스 터미널이 있던 ‘동대문’에서 ‘시청앞’까지 그것을 타봤다. 강원도에서 내가 봤던 기찻길의 터널은 산을 통과할 때만 뚫는 줄 알았는데, 도시 밑으로 굴을 뚫어 그 위로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있고, 건물이 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시골 소년이 전철을 생활의 한 부분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어른이 돼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였다. 살고 있는 집은 지금의 광운대학역 부근이었고, 매일 출퇴근해야 하는 직장은 마포에 있었다. 한 달 정기권을 끊어 매일 광운대역에서 서울역까지는 전철을 타고 거기에서 다시 아직 전철이 놓이지 않은 마포까지 버스를 탔다.

그때가 또 막 등단한 신인작가 시절이어서 읽어야 할 책도 많았다. 광운대역에서 서울역까지의 거리는 단편소설 한 편 읽을 수 있는 거리와 시간이었다. 왕복하면 하루에 두 편, 토요일까지 근무하던 시절이니까 한 달 동안 전철 안에서 내가 읽은 중단편 소설은 50편 정도라는 계산이 나오는데, 실제 매달 50편의 중단편 소설이 발표되는 게 아니어서 그 무렵 나는 우리나라 작가들이 문예지에 발표하는 거의 모든 중단편 소설을 전철 안에서 읽은 셈이었다.

아무튼 그 시절 전철은 나에게 땅속을 달리는 독서실과 같았다. 전철 안에서의 독서 분량만 해도 책으로 따지면 한 달에 다섯 권이 넘었다. 광운대역 부근에 살다가 전철 미개통 지역으로 잠시 이사했을 때 가장 아쉬워했던 것도 교통편 자체보다 집과 회사를 오가는 시간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직장을 그만두고 오직 글만 쓰고 사는 전업작가가 되면서 고양시 일산으로 이사를 했다. 1주일에 한 번 이런저런 일로 서울로 나가게 될 때 꼭 전철을 이용했다. 그때에도 손에 읽을 것만 들고 있으면 아무리 먼 거리도 지루하지 않았다. 흔히들 신도시는 자동차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신도시로 이사한 다음 자동차 운전을 졸업하고 전적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주중에는 춘천에 있는 김유정문학촌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가족이 있는 일산으로 돌아가는데 이때도 항상 전철을 이용한다. 어떤 사람들은 전철을 타면 거리 표정을 살필 수 없어 지겹기도 하다는데 나는 손에 읽을 것만 들면 전철보다 더 편한 교통수단이 없다. 아무리 먼 거리라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전찰 안에서 내가 가장 난감해하는 상황은 손에 읽을 것 없이 그것을 탔을 때다. 그러면 할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 그 안에서 읽을거리를 찾게 된다. 책읽기에 빠져 세상 풍경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아쉬움도 있겠지만, 책을 읽는 일 또한 세상을 살피는 일 중의 하나라고 여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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