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거대한 제조업 거점이었다. 산업화 시대인 1970년대 구로공단은 10만 명이 넘는 근로자가 섬유, 전기, 전자, 기계산업에 종사하는 수출산업의 전진기지였다. 이외에도 충무로 인쇄, 성수동 제화, 문래동 철공, 염천교 구두 등 각지에 다양한 업종이 집적됐다. 다른 지역이 부침을 겪는 가운데 동대문 근방에 밀집된 의류시장은 한류를 타고 K패션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재래식 도매시장으로 출발해 국내를 석권했고 현재는 글로벌 유명 브랜드의 패션쇼가 열리는 해외에서도 주목하는 지역이다. 동대문 제품을 주로 취급하는 소규모 판매자들을 입점시킨 여성패션 쇼핑 플랫폼 지그재그가 최근 1조원의 가치로 카카오에 인수되면서 미래 잠재력도 높이 평가받는다.
디지털 시대에도 역동성을 더해가는 동대문 패션의 경쟁력은 기획-생산-유통의 통합 네트워크다. 오전에 디자인이 나오면 오후에 샘플이 완성되고 3~4일이면 제품이 출시된다. 2주일 간격으로 신상품이 나오는 자라, 유니클로, H&M 등 세계적인 패스트패션 브랜드보다 빠른 속도다. 이는 동대문 반경 5㎞ 근방에 모든 프로세스가 집약된 자생적 분업시스템이 구축돼 있기 때문이다. 인근 창신동, 신당동 일대에서 영업하는 2만여 개의 의류도매상이 디자이너에게 주문하면 샘플이 만들어진다. 원단 패턴과 옷 샘플을 제작하는 디자인 개발 업체만 수백 개에 이르고 봉제공장은 3000여 개다. 주택가에 있는 10인 이하 소규모 공장들은 제조공정의 세부 프로세스를 분담한다. 개별 공장 간 원·부자재와 재공품의 이동은 오토바이가 담당한다. 디자인에서 생산과 판매까지 동일 지역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동대문은 ‘세계 최대의 패션 클러스터’로 불린다.
동대문 패션 클러스터의 핵심은 자생적으로 형성된 분업과 협력의 생태계다. 패션산업의 핵심인 속도와 효율성을 달성하면서 프로세스 전체의 유연성도 확보했다. 재단, 봉제 등 기본적 분업을 기반으로 치마 주름잡기, 단추구멍 만들기, 마무리 다림질 등만 담당하는 다양한 전문 공장이 네트워크로 연결된 최적화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낙후된 도심의 주택가에서 영세공장들로 형성된 생태계는 국내용 골목대장이 아니라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했다. 경쟁력의 원천은 전문적 역량과 상호이익에 기반해 형성된 자생적 네트워크다. 공급 측면의 비용 상승 압력은 프로세스를 세분화하고 독립시키고 연계하는 방향으로 대처했다. 오랜 시간의 협력은 거래관계를 단순한 발주와 하청의 관계가 아니라 신뢰하는 파트너로서 진화시켰다.
사양산업으로 간주된 부문이기에 실질적인 정책적 지원이나 대규모 자본 투입 없이도 동대문 근방에 K패션 클러스터가 형성됐다. 소위 사양산업, 성장산업이라는 추상적 논의와는 무관하게 시장은 자생적으로 적응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는 산업정책의 기본적 방향성이 인위적 개입이 아니라 자생적 질서의 촉진이어야 함을 나타낸다. 특히 디지털 시대에는 개방적 네트워크의 관점으로 정책적 지향점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경제산업 분야에서 정치인과 공무원의 무지와 공명심으로 생겨나는 설익은 정책과 불필요한 간섭이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훼손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동대문 인근 창신동 봉제골목에서 발원해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한 K패션의 자생적 생태계의 시사점을 성찰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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