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후 북디자이너라는 직종이 일반화되기 전까지 주요 서적, 잡지의 표지나 제호는 유명 화가와 서예가들의 몫이었다. 화가 김기창, 김창열, 이왈종, 천경자, 김환기와 서예가 손재형, 김충현, 이기우, 박원규 등이 책 디자인 작업에 참여했다. 좋은 책을 만든다는 사명감에, 혹은 호구지책으로 책을 꾸미는 붓을 들었다. 친분이 있는 문인이나 후배 출판인들의 부탁으로 ‘작품’을 만든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 거장이 참여한 책의 장정(裝幀)은 이제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중앙문화사 1954), 안수길의 《제3 인간형》(을유문화사 1954) 등 100여 권의 책표지는 한국 추상미술의 개척자인 수화(樹話) 김환기의 손길을 거쳤다. 정지용의 《지용시선》(을유문화사 1946), 박두진의 《해》(청만사 1949)의 표제는 시·서·화를 겸비했던 근원(近園) 김용준이 책임졌다.
이처럼 근현대 화단과 서예계의 거장들이 총출동한 ‘종합예술’인 옛 책 표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책이 출간됐다. 김진악 전 배재대 교수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옛 책에서 유명 예술가들이 제작에 참여한 책 450여 권의 표지를 모아 《아름다운 책》(시간의 물레·9만원)을 출간했다. 근 한 세기의 ‘북 디자인’을 총정리한 셈이다.
저자는 서예가와 화가별로 책 표지를 분류했고, 표지 작업에 얽힌 다양한 뒷얘기까지 담았다. 김 전 교수는 “60년 이상 보유하고 있던 장서를 정리하다가 한국 문화계의 역량이 총결집된 표지를 주제로 책을 내게 됐다”며 “화려하거나 품격 있는 옛 책표지를 보는 것은 마치 아름다운 표지 전람회를 보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