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반복되지 않는다. 되풀이된다면 더는 기적일 수 없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인간은 과거 성공했던 도박이 기적처럼 재연되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모든 것을 걸곤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감행된 나치 독일의 아르덴 대공세가 그 전형이었다. 절망적인 전세를 뒤집고자 아돌프 히틀러는 허를 찌르는 반격이라는 ‘한 장의 카드’에 남은 모든 전력을 걸었다. 그리고 도박이 드러낸 것은 오만과 욕망, 잔혹함이라는 인간의 ‘민낯’이었다.
전쟁사 전문가인 앤터니 비버의 《아르덴 대공세 1944》는 1944년 12월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대인 아르덴의 눈 덮인 삼림과 계곡에서 벌어진 독일의 ‘서부전선 최후의 반격’을 다룬 책이다. 장년층 이상에겐 ‘판처리트’(전차병의 노래)가 인상적인 1965년작 할리우드 영화 ‘발지 대전투’로 익숙하고, 젊은 밀리터리 마니아에겐 미국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배경으로 낯익은 사건을 다룬다.
히틀러는 22개 사단, 약 40만 명을 동원해 아르덴 삼림지대를 뚫고 벨기에 안트베르펜 점령을 목표로 하는 공세를 폈다. 연합군을 둘로 쪼개 미국의 전의를 꺾고, 영국과 캐나다를 전장에서 발 빼게 한다는 구상이었다. 12월 16일부터 한 달가량 벌어진 전투에서 전선이 돌출(벌지)된 형태였던 까닭에 ‘벌지 전투’로도 불린다.
히틀러가 연합군의 허를 찌르는 작전을 구상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연합군 수뇌부의 안일함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연합군은 이미 끝난 것으로 여겼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서부의 독일군은 사실상 궤멸됐다”고 분석했다. 영국 정부는 1944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언론은 주요 도시 탈환 소식을 전하기 바빴고, 장교들은 라인강을 단숨에 건널 생각만 했다. 미국 전시생산국은 포탄 생산을 포함한 군수 계약들을 취소했다.
반면 궁지에 몰린 히틀러는 일거에 전세를 역전하길 꿈꿨다. 동부와 서부 양전선에서 소모적인 방어전을 펼치느니 차라리 마지막 대공세를 취하는 것이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공격 지점은 4년 전 프랑스를 굴복시켰던 ‘전격전 신화’의 출발점 아르덴 삼림지대였다. 1870년과 1914년, 1940년에 독일군이 이곳을 통과했던 전례가 있었음에도 미군은 다시 아르덴이 공격받을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곳은 그저 병사들이 휴가를 보내는 ‘지친 병사들의 천국’이었을 따름이었다.
문제는 연합군이 오만했고 히틀러는 무모했다는 점이었다. 히틀러는 제공권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날씨가 나쁜 겨울에 싸우길 원했다. 그에 따라 병력과 장비, 보급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음에도 공격을 서둘렀다. 작전 계획은 엉성했고, 실행은 계획에 못 미쳤다. 독일군 장성들은 히틀러의 ‘대형 해결책’이 지도 위에서나 가능한 환상이라는 점을 잘 알았지만 그들의 반대의견은 묵살됐다. 결국 기적은 재연되지 못했고, 독일에 남은 마지막 기회는 아르덴에서 낭비됐다.
결정권자들의 우매함은 전장에서의 처참함으로 이어졌다. 아르덴은 처절한 전투의 공간이자 포로와 민간인 학살, 방화, 약탈, 강간이 난무하는 아비규환의 장소였다. 항복을 권유하는 독일군에 ‘개소리!(Nuts!)’라고 화답했던 토니 매콜리프 장군의 기개, “어쨌거나 독일 놈들을 죽이기만 하면 된다”는 조지 패튼 장군의 무용담만으로는 참상을 덮기 힘들다. 시작부터 진행, 마무리까지 끊임없이 인간의 어리석음과 잔인성이 저류로 흐른다.
저자는 《스탈린그라드》 《노르망디》 《베를린》 등 2차 대전의 변곡점이 됐던 극한의 전장을 배경으로 역사의 다층성과 복잡성을 실감나게 그린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아르덴》에서도 그의 장기를 흠뻑 맛볼 수 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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