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오후. 서울 소공동 한진그룹 본사의 한 회의장에 10명 남짓한 인원이 극비리에 모였다. 산업은행 임원, 로펌의 인수합병(M&A) 담당 변호사 등이 주위를 살피며 회의장에 들어섰다. 참석자들이 나눠 든 문서 표지엔 배 선착장을 뜻하는 ‘마리나(Marina)’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황망하게 사라진 한진해운이 부활이라도 하는 것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마리나는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에서 쓰인 ‘프로젝트명’이었다. 정보 유출이 곧 거래 무산으로 이어질 만큼 보안 유지가 극도로 중요하다 보니 혹여나 유출되더라도 다른 업종을 연상할 이름을 붙여 M&A를 진행했다.
독일 딜리버리히어로는 요기요의 매각을 추진하면서 태평양을 뜻하는 ‘퍼시픽(Pacific)’을 붙여 해석이 분분했다. 과거 딜리버리히어로의 배달의민족 인수 프로젝트명이 대양(大洋)을 뜻하는 ‘오션(Ocean)’이었던 점을 반영해 지었다는 설명이 가장 우세하다. 최근 열기가 뜨거운 이베이코리아 매각 프로젝트명으론 그리스 신화 태양의 신 ‘아폴로(Apollo)’가 낙점됐다.
프로젝트명은 많은 상징성을 지닌다. 어떤 타깃을 겨냥했는지, 인수 열의가 얼마나 높은지를 명칭을 통해 가늠할 수도 있다. 뚜레쥬르의 프로젝트명은 사각형을 뜻하는 ‘스퀘어(Square)’. 대표 제품인 식빵이 떠오른다. 골드만삭스PIA는 2014년 대성산업가스를 인수하면서 업종이 너무도 선명히 드러나는 ‘가스통(Gastong)’으로 불렀다. 삼성전자는 과거 일본 샤프에 투자할 때 필기구 샤프를 떠올리게 하는 ‘모나미(Monami)’를 프로젝트명으로 정했다.
M&A에 기업의 생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보니 많은 회사가 프로젝트명에도 그 의지를 담는다. 두산인프라코어 매각에선 ‘(산의) 정상’ 등을 뜻하는 ‘서밋(Summit)’이 낙점됐다. 그룹 내 정상에 오른 회사인 만큼 꼭대기에서 팔겠다는 포부를 담았지만 결과적으론 ‘중턱’에서 팔렸다는 평가다. HMM(당시 현대상선)은 한진해운이 보유하던 스페인 알헤시라스터미널 인수전에서 스페인 무적함대 이름을 따 ‘아르마다(Armada)’로 프로젝트명을 지었다. 회사를 무적함대처럼 재건하겠다는 의미를 포함했지만 함대의 결말이 썩 좋지 않아 반응은 엇갈렸다. SK텔레콤은 과거 존폐가 위협받던 하이닉스를 인수하면서 프로젝트명을 불사조라는 뜻의 ‘피닉스(Phoenix)’로 지어 그 이름처럼 ‘부활’시켰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프로젝트명은 쌍용차의 회생 절차에 쓰인 ‘프로젝트SS’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동반하고 주인을 찾기도 쉽지 않다 보니 쌍용차의 회생까지는 험로가 예상된다. 두 마리의 용을 SS로 형상화한 프로젝트명에 걸맞게 고난을 뚫고 비상(飛翔)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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