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현장에 꼭 보이는 커다란 삽을 달고 있는 기계. 바로 굴착기다. 이 굴착기에는 흔히 알려지지 않은 ‘이름의 수난사’가 있다. 이 기계는 과거에 포클레인 또는 굴삭기로 불렸다. 그러다 국립국어원이 1997년 굴삭기를 굴착기로 순화하면서 굴착기만 공식 용어가 됐다. 포클레인은 1970년대 두산중공업의 전신인 현대양행이 굴착기를 제조하면서 프랑스 회사 포클랭(Poclain) 이름을 쓴 탓에 명사로 굳어진 말이라 공식용어가 아니다. 포클랭도 과거 굴착기 제조로 유명한 회사였다.
국립국어원이 굴착기로 순화한 것은 굴삭기가 일본식 한자라는 이유에서다. 일본에는 착(鑿)이라는 한자어도 삭(削)과 마찬가지로 ‘사쿠’로 읽는다. 그래서 굴착기가 아닌 굴삭기라는 용어가 한국에 유입됐다는 것이다. 또 착과 삭이 둘 다 ‘파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한 단어로 통일했다는 논리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국립국어원 정의에 따라 현재 굴착기를 표준어로 정의하고 있다. 굴삭기 항목은 ‘굴착기로 순화’라고 적혀 있다. 관련 법령도 마찬가지다. 건설기계 관리법은 건설 기계 이름을 27개 분류해 놓고 있는데, 2019년 3월 굴삭기를 굴착기로 변경하는 개정을 했다. 국내 기사에서도 굴착기로 일원화해 게재하고 있다.
하지만 건설 현장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건설업 관계자들은 지금도 현장에서 굴착기와 굴삭기라는 용어를 다르게 쓴다. 굴삭기(Excavator)는 일반적으로 땅을 팔때 쓰는 건설기계를 칭하고, 굴착기(Drilling Machine)는 수직으로 땅을 파 내려가는 기계를 의미한다. 영어도 두 기계를 분류해서 쓴다. “엄연히 다른 기계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부르는 명칭이 달라야한다”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포클레인은 유압을 이용해 삽으로 땅을 파내는 기계로 분류한다.
굴착기 1위 업체인 두산인프라코어는 2012년 국립국어원과 한국교열기자 협회에 굴착기, 굴삭기, 포클레인의 의미를 구분해달라는 공문을 보낸 적이 있다. 하지만 9년째 답을 듣지 못했다. 건설기계업체들은 보도자료나 회사에서 자료를 공유할 때 굴착기라는 단어만 쓴다. 내부에선 굴삭기를 의미하는 내용을 다시 안내해야 하는 고충이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식 한자어를 순화하려는 시도는 좋지만, 현장에선 두 단어를 다른 용도로 쓴다”며 “무조건 순화하기보다 쓰는 사람들의 용법에 맞추는 게 우선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이와 관련한 기자의 질의에 대해 “과거에 다듬은 말이라도 의미가 다르게 쓰이고 있다면 정비하는 게 원칙”이라며 “(굴착기 관련된 사항을) 정비위원회 안건에 올려서 전문가들과 논의해보겠다”고 말했다.
참고로 굴착기의 대명사 격으로 통했던 프랑스 회사 포클랭의 입지는 지금은 크게 약해졌다. 회사 이름이 제품명으로 쓰일 정도로 유명했던 포클랭은 최근 건설 장비 대신 유압 부품 등을 주력으로 생산하고 있다.
김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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