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에는 권당 1000만 원짜리 책, 다른 손엔 인테리어용 책 한 묶음…'
한국에선 오래전부터 헌책방 골목, 고서 전문 판매가는 '사라진 풍경'이 됐습니다. 서울 청계천에 군집했던 헌책방들의 위용은 현재 일부 '흔적'만 남은 상태입니다. 부산 보수동에 그나마 헌책방 거리라고 부를만한 고서 판매 전문서점 밀집 지역이 남아있는 정도입니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일본 역시 온라인 서적 판매의 활성화, 독서 인구의 감소 등 한국과 동일한 어려움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고서점이 활발하게 영업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도쿄 한복판 진보초에 있는 간다 고서점 거리(神田古書店街)에는 200여 개의 서점이 영업 중입니다. 최근 코로나19 확산으로 도쿄에 긴급명령이 잇따라 실시되면서 이들 서점도 큰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여전히 명맥을 꿋꿋하게 이어가는 모습입니다.
간다 고서점 거리의 서점 대다수는 일본어 중고서적을 취급하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 등 서구 주요 언어 서적을 전문으로 다루는 양서 전문서점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간다 고서점 메인 거리에 있는 붉은색 유럽풍 건물이 눈에 띄는 기타자와서점(北澤書店)입니다. 서점에 들어서면 높은 천장에 나선형 계단, 2층에 올라섰을 때 보이는 양장본 고서들의 풍경에 압도되는 곳입니다.
1902년 창업한 이 서점은 오랫동안 간다 고서점가를 대표하는 '얼굴'로 자리매김해왔습니다. 대를 이어 운영된 이 서점에선 1950년대 이후부터 영미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한 서양 서적을 전문으로 다뤄왔습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출간된 가죽 장정의 '진짜 고서'들도 이 서점에선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가 자주 들렀고 해럴드 맥밀런 전 영국 총리와 일본 왕실 관계자들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코로나 확산 전에는 책을 구입하는 사람 못지않게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의 방문도 적지 않았습니다.
서점 측은 "책을 좋아하는 일본인이 많고, 양서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하는 지적 호기심은 언제나 왕성하다"며 "명저 원서를 읽고 싶은 분, 중량감 있는 가죽 장정 양서를 찾는 분을 고객으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기타자와서점조차 오랜 명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도 '책의 시대' '독서의 시대'가 끝나고, 온라인 판매 활성화로 고서점의 위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좋은 책을 보유하고 있으면 고객이 알아서 찾아온다"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2005년 건물을 리뉴얼했을 때 전성기 고서 부문 매출을 200이라고 할 때 100 정도 판매를 이어가는 게 목표였지만 재출발 첫해의 매출은 15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보초의 간다 고서점가에서도 도쿄도서점(東京堂書店)에 대형 양서 코너가 있었고, 칵테일서방(コクテイル書房) 원더랜드(ワンダ?ランド)를 비롯해 긴자의 '예나'. 다카다노바바의 '비블로스' 등의 양서 전문서점들이 적잖게 있었지만 대부분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에 기타자와서점도 필사적인 자구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온라인 전산화로 1만 권 이상의 재고를 갖추고 손님에게 적합한 책을 골라줄 수 있게 됐습니다. 온라인 배송도 시행됐습니다.
중요한 것은 책의 '장식적 효과'에 주목한 것입니다. 'KITAZAWA DISPLAY BOOKS'라는 온라인 판매 사이트를 별도로 만들어 디스플레이(장식)용 양서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양서의 장식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나선 것입니다. "콘텐츠가 아닌 껍데기를 판다" "영혼을 내놨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m 단위로 양서를 판매하는 다른 중고서적 업자와 달리 디스플레이용으로 적합한 서적을 1권 단위, 5권 세트로 가격을 매겨 판매하는 등 전문성을 높였습니다. 아무 책이나 묶음으로 집어서 판매하는 게 아니라 장정 상태와 디자인을 보며, 전체적인 조화를 노렸다는 설명입니다. 멋들어진 서가를 활용한 모델룸과 쇼룸, 각종 촬영 및 인테리어 코디업 등 부수 사업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훌륭한 고서를 다룬다는 '본령'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귀중본 서적, 유명책자의 초판본, 저자 사인본 등의 경우 수만엔~수백만 엔(수백만~수천만 원)의 깜짝 놀랄 가격에 거래가 이뤄지기도 합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영국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에서 나온 일부 희귀본들의 경우엔 유럽 현지보다 일본에서 오히려 책을 구하기가 더 쉽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로 고가의 고서 거래가 여전히 활발한 편입니다. 이들 책의 경우, 일일이 낙장이 없는지 확인하고 책의 상태를 꼼꼼히 살펴 가격을 메깁니다.
오프라인 헌책방은 이제 세계 어디서나 지난 세대의 유물이 되가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생존을 위한 치열한 변화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타자와서점의 분투는 그 좋은 사례일 것입니다. 앞으로 미래에는 고서점이라는 단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살아남는다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설지 궁금해집니다.
김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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