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투자자들의 편견을 깨는 성장스토리를 구상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막대한 유동성, 증시 호황, 초저금리 등 최적의 자금 조달환경을 맞은 상황에서 투자자들의 시선만 확실히 사로잡으면 조(兆) 단위 자금도 단숨에 확보하는 것이 가능해져서다. 기업가치를 높이는 효과도 덤으로 따라온다. 오랫동안 따라붙던 취약점을 떼어내고 더 높게 도약할 수 있다는 새 비전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전달하느냐가 웬만한 사업전략 이상으로 중요해지고 있다는 평가다.
◆'명품 청사진'이면 수조원도 거뜬
SK아이이테크놀로지(SK IET)는 지난 26일 기업공개(IPO) 공모가격을 희망범위의 최상단인 10만5000원으로 확정했다. 국내외 기관투자가들의 뜨거운 관심에 힘입어 기업가치를 약 8조8000억원으로 인정받으며 단숨에 8983억원을 확보하게 됐다.
이 회사는 불과 2년 전만 해도 SK이노베이션에서 분사한 2차전지 소재기업 정도로만 알려져있었다. 당시 전기차 배터리시장의 기대주인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보다 출발이 늦었고, 그만큼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낮았다. 상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SK이노베이션이 영업비밀 침해 문제로 LG화학과의 소송전에서 패배하면 타격을 받을 것이란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글로벌 3대 분리막 기업’으로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음을 증명해내자 투자자들이 줄을 섰다. ‘모회사의 소송 상대인 LG화학조차도 구매하는 분리막’이란 사실도 투자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에 2조원을 배상하기로 전격 합의하기 전부터 이미 기관들 사이에선 놓쳐선 안 될 대형 공모주 명단에 포함됐다.
한화시스템도 ‘변신 스토리’를 바탕으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경험하고 있다. 이 회사는 2019년 11월 상장 당시만 해도 일반 청약경쟁률이 16 대 1에 그칠 정도로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계열사 일감 비중이 큰 시스템통합(SI)과 성장세가 둔화된 방위산업을 주수익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크게 성장할 여지가 없다는 평가가 많았다.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증시에 입성한 한화시스템은 그 후 항공·우주사업을 새 먹거리로 키우면서 달라진 대우를 받고 있다. 김동관 한화그룹 사장이 직접 챙기며 신기술 개발과 인수합병(M&A) 등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가자 훗날 상당한 성과를 거둘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덕분에 이 회사 주가는 지난 1년간 두 배 이상 뛰었다. 한화시스템은 치솟은 주식가치를 발판 삼아 상장 당시 공모금액(4025억원)보다 세 배 많은 1조2432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추진하고 있다. 신주 발행에 따른 주식가치 희석 가능성에도 “미래사업 경쟁력을 키우는 실탄 조달”이란 평가에 힘입어 양호한 주가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하이브(옛 빅히트엔터테인먼트)도 ‘BTS 의존도가 높은 사업구조’라는 꼬리표를 떼려는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투자자들의 평판을 바꾸고 있다. 이 회사는 이달 초 저스틴 비버와 아리아나 그란데 등 해외 유명 가수들의 소속사인 미국 이타카홀딩스를 인수하기 위해 4455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한다고 발표했다. 사업확장을 위한 깜짝 빅딜(인수금액 1조1860억원)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펼쳐지면서 하이브는 기업가치 제고와 함께 성공적인 자금 조달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화솔루션과 포스코케미칼처럼 전통적인 제조업체로 분류됐던 기업들도 사업구조를 재편해 미래에 각광받는 산업의 대표주자로 평가받는 데 성공하고 있다. 화학회사였던 한화솔루션은 태양광과 수소 등 친환경에너지, 제철소용 내화물(벽돌) 제조업체였던 포스코케미칼은 2차전지 소재 분야에서 인정받으며 기업가치를 크게 높였다. 두 회사는 지난 1분기 유상증자를 통해 1조원 이상을 거뜬히 조달했다.
대형증권사 기업금융 담당임원은 “값싼 노동력과 생산설비만으로도 부를 창출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독창적인 사업모델이나 기술력에 자본력이 뒷받침된 기업만이 앞서나갈 수 있다”며 “투자자들도 이 같은 곳에 적극적으로 베팅하기 때문에 기업들이 오랫동안 굳어진 평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새 성장 스토리를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 정체성도 과감히 바꾼다
자금 조달계획에 얹어진 스토리가 빈약한 기업에 대한 평판은 갈수록 싸늘해지고 있다. 중견 해운사인 대한해운은 지난달 31일 1940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결정한 이후 11거래일만에 주가가 15%가량 추락했다. 빚을 갚기 위해 주주들을 상대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한다는 실망감이 반영됐다. 역대급 해운업 호황이 아니었다면 주가가 더 크게 요동쳤을 것이란 평가가 적지 않다.
지난 16일 3000억원 규모 영구 전환사채(CB) 발행계획을 밝힌 CJ CGV도 주가 하락을 겪고 있다. 코로나19에 따른 실적 악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또 한 번 유통주식 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자본 확충을 추진해서다. 해당 CB는 발행일(6월8일)로부터 한 달 뒤부터 투자자가 주식전환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7월에도 주주들을 상대로 대규모 신주를 발행해 2209억원을 조달했다.
자금 조달계획에 담긴 비전에 따라 조달성과와 기업가치가 극명하게 갈리자 기업들은 더욱 성장 스토리를 짜는 데 공 들이고 있다. '파이낸셜 스토리'를 경영 화두로 내건 SK그룹이 대표적이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지난해 말 각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에 "매력적인 성장 목표와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담긴 파이낸셜 스토리가 시장으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후 장밋빛 청사진을 그리는 데 매진하고 있다. 최근 SK텔레콤이 중간지주사 전환작업을 시작한 것도 이 같은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 지배구조 재편을 통해 자회사들을 통한 투자에 붙은 제약에서 벗어나면 더욱 적극적으로 몸집을 키울 수 있어서다. 현재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의 손자회사는 증손회사 지분 100%를 보유해야 한다. 이런 구조에선 손자회사가 합작회사 설립이나 지분 투자 등을 통해 외형을 키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SK그룹의 지주회사인 SK㈜를 모회사로 둔 SK텔레콤은 SK하이닉스, 원스토어, ADT캡스, 11번가, 티맵모빌리티 등 비통신 자회사들의 성장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이려는 전략을 오래 전부터 추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단순한 완성차 제조업체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친환경차뿐만 아니라 △수소연료전지 △자율주행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 등을 미래를 이끌 수익원으로 보고 이 분야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최근엔 로봇(보스턴다이내믹스), 모빌리티 플랫폼(그랩) 등 다양한 기술 기업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하며 사업영역을 갈수록 넓혀가고 있다. 기아의 경우엔 지난 1월 사명에서 ‘자동차’를 떼며 혁신적인 모빌리티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IB업계 관계자는 "이제는 스토리텔링이 자금 조달여력과 기업가치를 좌우하는 핵심요인이 되고 있다"며 “특히 오랫동안 저평가를 받는 기업일수록 투자자들의 눈길을 다시 끌기 위한 반전 스토리를 보여주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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