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골이 상접한 흰 소가 힘겹게 앞으로 나아간다. 고개를 들기는커녕 눈을 뜰 기력조차 없어 다리가 자꾸만 꺾인다. 하지만 기어이 한 발씩 내딛는 소의 모습에서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고난을 뚫고 나아가는 ‘백의민족’ 한국인을 표현한 이중섭의 ‘흰 소’(1953~1954)다. 이 작품은 1970년대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가 최근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에 기증된 흰 소는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진 다섯 점 중 하나로 극히 희귀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7일 이 회장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미술품 1488점의 세부 내역을 공개했다. 기증품은 한국 근현대 미술 걸작(1369점)과 서양 거장들의 작품(119점)으로 구성됐다. 회화(412점)와 판화(371점), 드로잉(161점), 공예(136점), 조각(104점) 등 다양한 장르가 고루 포함돼 있다.
기증품 목록에는 미술계 인사조차 보지 못했던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첫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의 대표작 ‘화녕전작약’은 1930년대 수원 고향집 근처에 있는 화녕전 앞에 핀 작약을 강렬한 색채로 표현한 그림이다. 나혜석의 작품 대부분이 소실돼 가치가 더 높다. 청전 이상범(1897~1972)의 ‘무릉도원도’는 존재만 알려졌을 뿐 실물을 본 사람이 거의 없었던 ‘전설의 그림’이다. 청전이 25세 때 후원자의 요청으로 제작한 그림으로, 과감하고 아름다운 색채와 구성이 특징이다.
작품 중 상당수는 작가의 대표작이다. 이중섭의 스승 백남순(1904~1994)의 ‘낙원’(1937)이 그렇다. 윤 관장은 “낙원은 한국의 무릉도원 전통과 서양의 아르카디아(낙원) 사조가 묘하게 결합된 독창적인 작품으로, 1930년대 백남순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전해지는 만큼 역사적 의미가 각별하다”고 강조했다. 운보 김기창(1913~2001)이 1955년 그린 가로 4.08m, 세로 2.05m의 대작 ‘군마도’도 작가의 최고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말들의 동세를 역동적으로 표현했다.
‘국민 화가’ 이중섭의 작품이 무려 104점이 되는 것도 눈길을 끈다. 이와 별도로 이중섭의 작품 12점이 제주도 이중섭미술관에, 8점은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된 점을 고려하면 고인의 ‘이중섭 사랑’을 짐작할 만하다. 윤 관장은 “내년에 이중섭 작품만으로 특별전을 열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김환기(1913~1974)의 전면점화 ‘산울림 19-II-73#307’(1973)도 빼놓을 수 없는 기증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기증 덕분에 비로소 김환기가 최전성기에 그린 점화를 보유하게 됐다.
해외 거장들의 작품 중에서는 호안 미로의 ‘구성’(1953)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에는 노랑·빨강·파랑 등 원색을 사용해 단순하고 경쾌하며 자유분방한 구성을 선보이는 미로의 작풍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기증품에 포함된 파블로 피카소의 도예 작품 112점 중 한 점의 사진(사진)도 새로 공개됐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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