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백신 사태로 본 '선진국'의 문턱

입력 2021-05-07 18:39   수정 2021-05-0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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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미국 캘리포니아주 플래즌튼시 앨러미다카운티 박람회장(Fairgrounds). 넓은 주차장엔 차량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기다리는 대기줄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강력한 백신 접종 정책으로 누구나 쉽게 백신을 맞을 수 있게 한 결과다.

실제 미국에서 백신 접종은 다른 행정 절차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간단하고 빨랐다. 당일 오전 10시께 전화로 예약을 요청하니 사회보장번호(신분) 확인절차 없이 백신 접종 유의사항만 전달한 뒤 집에서 가까운 접종장으로 배정이 됐다. 승용차를 몰고 가 차례가 되면 창문을 내려 소매만 걷으면 끝났다. 2차 접종 예약도 그 자리에서 이뤄졌다. 백신을 접종해 준 간호사 외엔 접촉자가 한 명도 없었다. 백신은 화이자였다.

간편하고 안전한 방법 덕분에 미국인들의 호응도 좋다. 이날 백신 주사를 맞고 환호를 지르는 미국인들도 보였다. 월넛크리크시에 거주하는 토니 챙 씨는 “시민권이 없어도 백신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며 “가족 모두 2차 접종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이달 초 기준으로 백신 접종을 마친 미국인은 1억 명을 넘어섰다.

이날 앨러미다카운티가 백신을 접종한 방식은 1년 전 한국이 코로나19 감염 진단 때 도입한 ‘드라이브 스루’였다. 당시 세계 각국에서 모범 사례로 알려졌다고 한국 정부는 자랑스러워했다. 이 무렵 정부와 정치권에선 ‘K방역’이란 조어도 생겼다. “자고 일어나니 선진국”이라는 말도 등장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한국과 미국은 정반대의 상황이다. 하루 10만 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오던 미국에선 백신이 빠르게 골고루 퍼지며 예전 생활로 복귀할 채비를 갖췄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제 야외에선 모두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말할 정도다. 반면 성공적인 방역이라고 자평했던 한국에선 같은 날 기준 한 번이라도 백신을 맞은 인구는 350만 명을 간신히 넘고 있다. 인구 100명당 7명꼴이다. 한국에선 과잉 면역반응이 없다는 mRNA(메신저 RNA) 방식의 화이자나 모더나 백신을 구하지 못해 아데노바이러스 전달 방식의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주로 맞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한국의 성공적인 방역엔 공무원 등 방역요원의 희생과 제조업의 힘이 컸다. 사상 초유의 팬데믹엔 ‘매뉴얼’이 없었다. 매뉴얼이 없으니 한국 정부는 공무원을 총동원해 관리했다. 온몸이 땀에 젖은 간호사나 방역 공무원의 과로는 ‘애국’과 ‘희생’으로 장려됐다. 한국은 마스크나 세정제 등 당시 방역에 필요한 제품을 곧바로 만들어냈다. 제조업 기반이 무너진 영국 등에선 이 제품들을 구하기 힘들었을 때다. 1년 전 미국에서도 마스크 한 장 가격이 10달러(1만1000원)까지 뛰었다.

상황이 달라진 건 올해 들어서다. 지난해 말부터 미국 영국 등에서 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완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백신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나라들은 마스크와 세정제처럼 백신 문제에서 자국 우선주의를 취했다. 전체 백신 접종의 4분의 3이 선진국에서 이뤄지고 있다. 미국에선 화이자 백신을 3차 접종까지 권하면서 다른 국가들은 백신을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1995년 발효된 무역관련지식재산권협정(TRIPs) 탓에 백신 개발국이 아니면 제조시설이 있어도 백신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지난 5일 지식재산권 일시 포기 지지 의사를 뒤늦게 밝히긴 했지만, 범위와 포기 시점 등은 아직 불투명하다. 1년 전 방역 선진국이라고 자평한 한국도 미국의 눈치만 보고 있어야 할 판이 된 것이다.

지난 1년간 이어진 코로나19 사태는 한국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제조업 강국이지만, 여전히 원천 기술로 들어가면 부족하다. 시스템이 아니라 정신력과 극한의 체력까지 끌어내는 분위기로는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비슷한 상황이 과거에도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90년대를 맞이하자 ‘한강의 기적’이라고 자평하기 시작했다. 선진국들만 가입한다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서둘러 들어갔다. 몇 년 뒤인 1997년 국가적 재난이 찾아왔다. 당시 외국 언론은 “한국이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고 비아냥댔다. 코로나19 초기 방역에서 성공을 앞세워 ‘K방역’이니 “자고 일어나니 선진국”이라는 자평 후에 백신 부족 사태를 맞이한 지금이 그때와 달라진 건 없는지 돌아봐야 할 때다.
美 "7월 4일 독립기념일엔 성인 70% 접종"
미국 정부는 올해 1월부터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 100일 내 2억 회 접종’ 목표에 따른 것이었다. 첫 접종은 고령자와 기저질환자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1월 말부터 확진자 수가, 2월엔 사망자 수가 감소세로 바뀌었다.

백신 효과가 나타나자 미국 내 모든 주(州)의 성인으로 접종 대상을 확대했다. 시민권자뿐 아니라 주소가 있는 모든 성인이 접종 대상에 포함됐다. 지난달엔 하루에 340만 회까지 접종이 이뤄졌다. 미국에선 연방정부가 주정부로 백신을 공급하고, 주정부가 상황에 따라 단계별로 일정을 지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달 8일엔 인구의 33.7%에 달하는 1억1204만여 명이 최소 1회 접종을 마쳤다. 지난 4일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까지 성인의 70%가 백신을 한 번은 맞게 하겠다는 새 목표를 제시했다. 미 식품의약국(FDA)은 오는 9월엔 2~11세 어린이를 상대로 한 화이자 백신의 승인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백신 덕택에 경기도 살아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미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2%(작년 말)에서 지난 3월 6.5%로 상향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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