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프린터 기업 휴렛팩커드(HP)가 4년 전 삼성으로부터 사들인 레이저프린터 사업을 대만 폭스콘에 매각하기로 하면서 사업장이 있는 중국 웨이하이에 협력업체로 진출한 한국 중견·중소기업들에 비상이 걸렸다. 그간 설비투자를 지속해 왔는데 폭스콘이 일부 부품 내재화에 나서면서 경영악화가 불 보듯 뻔해졌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현지 한국 기업 공장이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9일 부품업계에 따르면 HP는 중국 웨이하이에 있는 레이저프린터 제조법인(HPPS)을 폭스콘에 매각하기로 최근 계약을 체결했다. 폭스콘과 미국 제이빌, 중국 레노보가 경합한 가운데 폭스콘이 낙점됐다. HPPS는 HP가 2017년 삼성전자로부터 인수한 레이저프린터 제조법인이다. 이 계약에 정통한 관계자는 “폭스콘이 공장을 인수해 제품을 생산한 뒤 다시 HP에 공급하는 위탁 생산 조건부 매각”이라고 설명했다.
현지에서 HP에 프린터 부품 등을 공급해온 한국 중견·중소기업 등 협력사 20여 곳은 발칵 뒤집혔다. HP와 폭스콘의 계약에 부품 내재화 조건이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폭스콘이 위탁 생산 조건부 매각을 받아들이며 반대급부로 일부 부품을 직접 생산하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구체적으로 사출, 프레스, 어셈블리, 전기회로물(PBA) 등 네 가지 품목이다.
이들 부품을 생산해온 한국 기업으로선 공장을 놀려야 할 공산이 크다는 관측이다. 현지 부품업체 관계자는 “그간 HP 요청에 꾸준히 시설투자를 하며 생산능력을 확대했다”며 “폭스콘이 부품을 내재화하면 일감이 떨어져 공장을 제대로 돌리지 못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아예 공장 문을 닫아야 하는 기업들도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이들 대부분은 최근 3년간 생산능력을 40% 안팎 늘렸다는 전언이다. 코스닥시장 상장사 파커스(옛 대진디엠피)가 아코디스 중국 법인, 대해전자를 잇따라 인수하며 몸집을 불렸다. 코로나19로 경영환경이 녹록지 않은 가운데 일감이 더 줄어들면 생존을 장담하기 힘들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매출이 1000억원대였던 파커스는 지난해 매출이 783억원으로 줄었다. 신흥정밀 매출은 2019년 8164억원에서 작년 6886억원으로 감소했다.
다급해진 협력사들은 단체행동에 나섰다. 공동성명을 내고 기존 공급망 유지를 HP에 요청했다. 그러나 HP는 “폭스콘에 잘 협조해 달라”고 할 뿐, 묵묵부답이라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결제 방식 변경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HP는 60일 현금결제인 반면 폭스콘은 90일 어음결제 방식을 쓰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HP가 HPPS를 매각하기로 한 것은 원가 절감이 큰 이유라는 분석이다. 폭스콘은 기존 대비 원가를 8% 낮추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중 무역분쟁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중국은 지난해부터 관공서 등이 미국 사무용기기를 사용하려면 당국에 신고하도록 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 기업들이 사무용기기 시장에 뛰어드는 데다 코로나19에 따른 재택근무 영향으로 프린터 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다. 중상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중국 프린터 시장 규모는 2020년 690억위안에서 올해 730억위안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2022년에는 780억위안 규모가 예상된다.
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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