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이건희 미술관은 어떨까

입력 2021-05-09 18:22   수정 2021-05-10 02:43

마네 모네 드가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세잔. 중학교 때였던가. 그 이름을 무조건 외웠다. 인상파 화가. 모자라는 미술 실기 실력을 암기로 극복하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기억의 마술은 지금도 그 이름을 입에서 맴돌게 한다. 의문도 있었다. ‘인상파 화가가 이 사람들밖에 없었나?’

의문은 수십 년 뒤에 풀렸다. 7명의 작품은 귀스타브 카유보트라는 화가이자 수집가의 컬렉션이었다. 카유보트는 유명하지 않았던 시절 이들의 작품을 싸게 사들였다. 죽기 전 작품을 정부에 기증하고, 국립미술관에 전시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당시 인상파는 가치를 평가받지 못했다. 프랑스 내에서 몇 년간 엄청난 논란이 일었다. 그리고 1897년 마침내 전시가 성사됐다. 관객이 몰려들었다. 논쟁과 관심은 이들을 인상파의 대표적 화가로 만들었다.
카유보트 사건
얼마 전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들이 2만3000여 점의 작품을 기증하기로 했다. ‘이건희 컬렉션’이라고 불리는 리스트를 보며 ‘카유보트 사건’이 떠올랐다. 이미 유명해진 예술가들의 작품이지만 ‘이건희 컬렉션’이란 이름이 붙으면 뭔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위대한 예술품을 직접 대면하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현상을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정작 스탕달은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하지만. 스탕달 신드롬을 느낄 정도의 수준은 되지 않으나 이건희 컬렉션을 국내에서 직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 가슴이 들뜨는 미술 애호가도 상당수일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을 어디에 전시할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물론 정부의 구상처럼 다양한 미술관에 분산 전시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작품 특성에 맞는 미술관, 박물관에 가면 그곳의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는 의미가 있을 테니.

하지만 이건희 컬렉션을 한곳에 모아놓는 게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회장 유족들이 내는 상속세 일부를 떼어내 제대로 된 미술관을 하나 건립하는 게 득이 더 클 것 같기 때문이다. 한국의 구겐하임 미술관 정도가 될까.
이건희에게 예술이란
소장가의 철학이 담긴 컬렉션은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 때문만은 아니다. 어디에 짓던 그곳은 관광 코스가 될 것이고, 예술가와 시민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충분히 투자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건희 미술관을 지어놓으면 삼성은 가만히 있을 것인가. 아니다. 그 이름값 때문에라도 무언가 기여할 수밖에 없다. 삼성이 사회와 대화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 회장에 대해 작가 이우환은 이렇게 표현했다. “이 회장은 사업가라기보다 광기를 품은 예술가로 생각됐다.” 이 회장은 작품의 존재감이나 완성도가 높은 것을 선호했다. 이우환은 이어 “한국 미술품도 언제나 세계적인 시야로 작품을 선별했다”고 했다. 많이 듣던 말이다. 많은 경영자들이 국내 시장만 바라보던 1990년대 초부터 이 회장은 ‘세계화’를 말했다. 그에게 미술품이나 제품에 중요한 것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회장은 비즈니스에서도 예술을 언급했다. “경영이란 종합예술이다” “구매를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등이다. 예술은 아마도 그에게 완벽의 상징이었던 듯하다. 그런 수집가가 모은 작품들을 ‘이건희 미술관’에서 한번에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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