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타계한 수묵추상의 거장 산정(山丁) 서세옥 화백(1929~2020)의 걸작과 그의 컬렉션이 국민 품에 안겼다. 산정의 유족이 12일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에 미술품 총 3290여 점을 기증키로 하면서다.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의 ‘세기의 기증’을 시작으로 문화계에서 아름다운 기증이 잇따르는 모양새다.
성북구는 이날 성북구청에서 산정의 유족과 ‘고(故) 서세옥 작품 및 컬렉션 기증을 위한 협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기증품은 산정의 주요 구상화 및 추상화 450점을 비롯해 드로잉과 전각 등 작가의 모든 작품 세계를 망라하는 2300여 점이 주를 이룬다. 성북구는 “서세옥의 작품 세계를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증품들”이라고 설명했다.
고인은 사람을 주제로 한 한국화 추상 작품을 주로 그렸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는 인간이라는 산정의 철학이 녹아든 작품들이다. 이번 기증품 중 ‘춤추는 사람들’(1989)은 그의 대표 연작 중 하나다.
단순한 선과 툭툭 찍은 점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신명나게 춤추는 모습을 표현했다. 짙은 농묵과 갈필을 넘나드는 강렬한 표현에서 인간의 강렬한 생명력과 움직임, 한국 특유의 정(情)이 그대로 느껴진다.
산정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소정 변관식, 소전 손재형, 근원 김용준 등 대가들의 작품 990여 점도 함께 기증됐다.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 한국 미술의 맥을 아우르는 방대한 컬렉션이다. 손재형의 서예작품 중에서는 그림의 뜻이 불교의 선과 통한다는 뜻의 ‘화의통선(畵意通禪)’(1958)이 눈에 띈다. 넉넉한 필획과 절도 있는 운필 등 소전의 독창적인 서체가 잘 드러난 걸작이다. 김용준의 수묵채색화 ‘추강’(1943)은 한국적 미의식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수준 높은 작품이다.
세계적 설치작가인 서도호, 저명한 건축가인 서을호 등 산정의 유족은 최근 대구미술관에 고인의 작품 90점을 기증하는 등 지역 미술관에 잇따라 경사를 안겨주고 있다. 서울에 있는 국립 미술관에 비해 예산이 열악한 지역 미술관에는 더없이 가치 있는 선물이다.
성북구는 이번 기증을 계기로 ‘산정 미술관(가칭)’ 건립을 추진키로 했다. 기증 작품은 미술관을 건립할 때까지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소장, 관리할 계획이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새로 짓는 미술관을 한국에서 손꼽히는 지역 기반 작가 미술관으로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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