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달력을 오려 인형을 만들고, 옷을 입히다 보니 어느새 디자이너가 됐네요.”
국내 패션디자이너 중 최초로 세계 4대 패션위크(파리, 밀라노, 런던, 뉴욕)에 동시 초청받은 김보민 디자이너(47)는 시종일관 들뜬 목소리였다. 서울 마곡동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연신 손으로 자신이 지은 옷을 만지며 말했다. “아직도 옷을 만들 때면 떨립니다. 뉴욕컬렉션에 작품을 내기 위해 한 달 반 동안 밤을 새우다시피 일했는데 옷 만드는 즐거움에 버텼어요.”
김 디자이너는 초등학교 때부터 패션디자이너를 꿈꿨다. 달력을 찢어 인형을 만들고, 인형에 천을 씌우며 놀고 있으면 집안 어른들이 “디자이너가 되려나 보다”라고 했다. 선생님이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패션디자이너”라고 답했다. 그림을 그리고 예쁜 걸 만드는 게 좋았다.
그렇게 패션디자인을 전공하게 됐지만 좌절도 컸다. 주위에 패션 또는 예술에 종사하는 지인이나 이끌어줄 멘토가 없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김 디자이너는 “대학에 다니던 2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은 패션 불모지였다”며 “모든 걸 혼자 시행착오를 겪으며 해나가야 했기 때문에 막막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새로운 브랜드 블루템버린의 밴쿠버패션위크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번 컬렉션의 콘셉트는 ‘세상 모든 차별에 대한 반대’다.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가치관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트렌스젠더 모델과 흑인 모델, 시니어 모델을 섭외해 패션쇼를 열었다.
김 디자이너는 “개인의 단점을 가리기보다 장점을 강조하는 옷이 이상적인 패션”이라고 했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것, 편견에 당당한 모습이 가장 이상적인 패션이란 설명이다.
그는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는다. 이번 의상 디자인의 아이디어도 대화 속에서 찾아냈다. “‘어떤 옷을 입고 싶어요’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은 ‘나다운 옷’, 어떤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옷’이라고 말합니다. 예컨대 여성들은 때로는 귀엽게, 때로는 섹시하고 우아하게 보이고 싶어 합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페르소나(가면)가 존재하죠. 각자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도록 하는 옷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김 디자이너는 이번 작품의 소재로 ‘자유의 상징’으로 불리는 데님(두꺼운 면직물)을 활용했다. 자유와 격식 두 가지를 모두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소재다. 그는 “데님은 입었을 때 편안하고 몸매를 돋보이게 해준다”며 “활동성 있고 편안한 소재로 데님만 한 것도 없다”고 말했다. “데님은 가죽과 레이스, 실크 등 어떤 소재와도 잘 어울리기 때문에 격식을 갖춘 옷을 만들기에도 좋다”고 설명했다.
K패션이 글로벌 무대에서 성장하기 위해선 디자인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이 지난해 한국에서 올린 매출이 1조원이 넘을 정도로 명품에 관심이 많지만 해외에 이름이 알려진 한국 브랜드는 ‘준지(JUUN.J)’와 ‘우영미’에 그친다. 의류 생산 등 제조 경쟁력은 베트남 중국 등에 밀린 지 오래다. 김 디자이너는 “국내 패션사업은 1960~1970년대 동대문 도매상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글로벌 무대에서 경쟁하기 위해선 디자인이 핵심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밴쿠버패션위크에도 블루템버린을 제외하고 국내 디자이너는 한 명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김 디자이너는 “봉준호 감독이 3대 영화제에 작품을 출품해 상을 받기 전까지 한국인은 영화제가 무엇인지도 몰랐다”며 “해외로 나가 계속 문을 두드리면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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