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제기된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부실회계 의혹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기부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의문을 품게 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1년이 흐르는 동안 공익법인의 회계공시를 강화하는 쪽으로 법·제도가 일부 정비됐지만, 상당수는 회계처리가 여전히 불투명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부금 지출 내역을 상세히 밝히지 않은 채 한 항목에 몰아넣거나, 지출 목적을 ‘기타’ 등으로 모호하게 기재한 곳이 많았다. 19일 한국경제신문이 국세청에 공시된 공익법인 40곳의 ‘기부금품의 수집 및 지출 명세서’를 분석한 결과다.
공익법인은 기부금 얼마를 받았고,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매년 공시해야 한다. 기부금 지출 내역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과 법인세법에 따라 공개하도록 돼 있다. 한 개 단체에 연간 100만원 이상 기부금을 지출하면 해당 단체명, 목적, 수혜 인원, 금액을 각각 적어야 한다. 기부금 운용의 투명성을 높이려는 취지다.
하지만 상당수 공익법인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주거취약계층을 위한 복지 사업을 펼치는 주거복지연대는 지난해 13억3300만원의 기부금 수입을 거둬 16억원을 썼다고 공시했다. 이 중 59.8%에 해당하는 9억5800만원을 ‘관리비·인건비 등’으로 지출했다고 밝히면서 지출 목적은 ‘기타’로 뭉뚱그렸다.
주거복지연대 관계자는 “모든 지출은 지출결의서와 영수증빙을 갖추고 있고, 홈페이지 게시내용에는 공시 내용을 쉽게 정리해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했다”며 "규정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기부금에 대한 목적, 수혜 인원, 금액을 세부적으로 작성하지 못한 미진함은 인정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앞으로는 연간 100만원 미만의 기부금에 대해서도 세부내역을 충분히 작성하고 공시해 공익법인 회계 투명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결핵협회는 지난해 기부금 30억6000만원을 346곳에 썼다고 공시하면서 지출 목적은 전부 ‘결핵 퇴치’라고 적었다. 지급처 이름도 절반 이상은 ‘대한결핵협회’로 기재했다. 협회 관계자는 “기부금을 공시한 내역 외에 허투루 쓴 것은 없다”며 “다만 지출 목적을 결핵 퇴치로 일괄 기재한 부분은 개선할 필요를 느낀다”고 했다.
동물 보호 시민단체인 동물권단체 케어는 지난해 3억2348만원을 지출했다고 공시했다. 지출 명세서엔 3억2348만원 전부를 ‘디오주식회사 외’라는 곳에 구호동물 사업비 목적으로 썼다고 기재했다. 케어 관계자는 “동물 치료비로 쓰인 돈이 많은데, 1년치 내역을 전부 작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홈페이지와 총회 등을 통해 수입·지출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부터 공익법인 공시 관련 법도 강화됐다. 2020사업연도부터 공시 대상 공익법인이 ‘자산 5억원 이상(또는 연간 수입 3억원 이상) 공익법인’에서 ‘모든 공익법인(종교법인 제외)’으로 확대됐다.
그런데도 공익법인의 회계처리는 여전히 불투명한 실정이다. 공익법인의 재무 투명성을 평가하는 한국가이드스타가 2020년 기준으로 공익법인 1만514곳 중 599곳의 재무건전성 및 투명성 등을 평가한 결과 만점을 받은 법인은 전체의 0.3%(30곳)에 그쳤다. 전년의 1.5%보다 되레 1.2%포인트 줄어든 것이다. 박두준 한국가이드스타 연구위원은 “선진국과 비교해 한국의 공익법인 공시제도는 운영 투명성 등을 검증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공익법인법과 상속세 및 증여세법은 같은 공익법인이란 용어를 쓰면서도 적용하는 규제가 다르다. 이 중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공익법인은 엉터리 회계처리를 하더라도 마땅한 처벌근거가 없다.
재정여건상 회계 담당자를 따로 두는 것도 쉽지 않다. 강대준 인사이트파트너스 대표회계사는 “공시제도가 복잡한 데다 관련 법이 매년 바뀌기 때문에 영세한 공익법인은 이를 감당할 능력을 갖추기 쉽지 않다”면서도 “기부자가 단체를 믿고 후원할 수 있도록 투명성이 제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양길성/최다은/최한종/최예린 기자 vertig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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