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멸망한다는 것은 군대가 전투에서 패하고, 정부가 괴멸하고, 지배계급이 파멸하는 것을 일컫는 게 아니다. 단순히 삶이 비참해지고, 자존심이 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파멸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는 선조들처럼 명예를 간직한 채 역사에 남았고, 자의든 타의든 살아남은 자들은 포로로 잡혀 ‘유민(流民)’이라는 신분으로 살육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했다. 또 자발적으로 망명하거나 탈출을 시도했고, 일부는 부활에 성공했다. 한민족의 슬픈 ‘디아스포라(diaspora·고국을 떠나는 사람·집단의 이동)’다.
669년 5월엔 20만 명(《자치통감》엔 3만8200호, 《구당서》엔 2만8200호)이 끌려가 요서지방, 산둥반도, 강회 이남(장쑤성·저장성), 산남(내몽골 오르도스), 경서(산시성·간쑤성), 량주(칭하이성과 쓰촨성이 만나는 주변 지역) 등의 불모지에 분산됐다. 또 679년에는 요동지역의 유민들을 하남(내몽골 오르도스)과 농우(간쑤성과 칭하이성 일대)로 이주시켰다. 이후에도 여러 번 끌려가서 나중에는 요동지역에 남은 사람이 2만 명이 못될 정도로 줄었다(지배선, 《고구려 백제 유민이야기》, 2006).
둘째, 노동력 특히 버려진 땅을 개척하는 노예로 활용하고,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용맹한 고구려 포로를 이용해 또 다른 민족에 대항하게 하는 정책 때문이다. 고구려 포로들이 그 멀고 거친 환경에서 이민족들과 생사를 걸고 전쟁을 벌였던 현장에 가면, 이들의 고난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진다. 그 시기에 당나라는 동서남북으로 안정된 곳이 없었다. 북쪽인 하남에서는 튀르크와 거란을 방어해야 했고, 동쪽에는 이진충이 일시 통일을 이룬 거란이 있었다. 발해 건국군은 산발적으로 공격해왔다.
서남쪽에서는 강력해진 토번(지금의 티베트)이 수도 근처까지 위협할 정도였다. 747년에 고선지가 힌두쿠시의 탄구령을 넘어 세계적으로 위명(威名)을 떨쳤는데, 그가 지휘한 단결병(團結兵) 중 많은 수는 고구려인이었다. 또 실크로드 지역에서는 튀르크계를 방어하면서, 중앙아시아에 진입한 아랍 세력까지 견제해야 했다. 윈난성의 다리(大理)지역을 중심으로 훗날 당의 7만 대군을 전멸시킨 남조국이 성장 중이었다.
또 한 무리는 이미 진출해 교류했던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늦가을부터는 추위와 강풍 때문에 동해를 건너는 일이 어렵지만, 북서풍을 이용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유민들은 희생을 치르며 동해안의 이시카와현, 니가타현 등에 도착했고, 일부는 다양한 경로로 간사이(關西)·간토(關東)의 여러 지역으로 이동했다. 신(新)일본국은 716년에 간토 지역 7개 군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인 1799명을 모아 무사시(武藏, 사이타마현) 지역에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했다(《속일본기》). 수장은 고구려 사신단의 부사였던 약광(若光)이었는데, 사후에 ‘고려명신(高麗明神)’으로 히다카(日高)시 고마(高麗)신사의 신주로 모셔졌다. 고구려인 정착 1300주년인 2016년에 신사를 방문했더니, 기념행사 때문인지 활기가 넘쳤다. 도쿄만 일대는 고마에촌(江村)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8세기의 거주지, 가마터 등 유적과 많은 신사가 있어 고구려 유민들이 개척한 곳임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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