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은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사진)의 3주기 였다. LG그룹은 고인을 추모 행사를 별도로 열지 않았다. 사내 게시판에 고인의 영상물을 올린 게 다였다. 영상물의 내용도 간단했다. '고객 경영'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한 여러 장면들이 이어졌다. 고 구 회장은 영상에서 “내부 보고에 쓰는 시간을 줄여 한 시간이라도 더 고객과 만날 것”을 강조했다.
LG그룹의 이같은 소박한 행사는 LG가(家)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LG가는 예전부터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차녀인 이숙희씨가 LG가로 시집을 가서 문화적 차이를 느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삼성가 딸, LG가 남자와 결혼해서 문화적 충격 받아
이 회장은 자녀들에게 최고의 물건을 써야 최고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삼성가에서 자란 이씨가 본 LG가는 삼성과 다른 점이 많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LG가는 전깃불·수돗물도 아껴쓰라고 집안 사람들에게 강조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이씨의 남편인 구자학 현 아워홈 회장은 금성사 사장, LG반도체, LG건설 회장 등을 맡았었다. 2000년 아워홈을 갖고 독립했다.
구광모 LG 회장 조용한 경영행보 이어가
구광모 LG 회장도 이같은 집안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구 회장은 2018년 6월 말 대표이사 회장으로 선임된 뒤 별도 취임식을 열지 않았다. 당시 임직원들에게 이메일 등을 통한 메시지도 전하지 않고 조용히 업무를 시작했다. 취임한 지 3년이 되어가지만 아직까지 대외활동은 되도록 자제하는 분위기다. 한 LG 관계자는 "어떤 사안에 대해 첫 보고에 들어가면 본인의 의견을 거의 말하지 않고 임직원의 이야기를 경청한다"며 "섣불리 의견을 꺼냈다가 부하직원들이 총수 눈치를 보면서 회사 전략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중하지만 결단력 있어
구 회장은 신중하지만 우유부단함과는 거리가 멀다. 지난 4월 LG전자가 이사회를 열고 스마트폰 사업(MC사업본부) 철수를 결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LG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은 2015년 2분기 이후 23분기 연속으로 영업 적자를 냈다. 누적 적자는 5조원대 수준이었다. 회사의 철수 결정엔 구광모 LG 회장의 결단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구 회장이 2018년 취임 이후 계속해서 선택과 집중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LG에너지솔루션이 SK이노베이션과 2년여 끌고 온 전기차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분쟁에서 지난 4월 2조 원의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도 강단 있는 총수의 경영 스타일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LG는 공식적으로 구 회장이 해당분쟁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LG 내부에선 LG에너지솔루션 임직원들이 총수의 결단력을 믿고 SK이노베이션에 대응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재계에선 구 회장의 조용한 행보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LG 내부에선 총수 일가가 경영 일선에 나선 뒤 4~5년 간은 직원들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경영 기본기를 다지는 대신 외부에 되도록 나서지 않는 분문율이 있다"고 말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