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사진)은 서울대 경력개발센터에서 개최한 ‘동문 선배 초청 특강’에서 “살면서 수많은 좌절감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후배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사장은 이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SK하이닉스 회사 소개 등을 하고 학생들과 질의응답 시간도 보내며 80분간 강의를 온라인으로 풀어나갔다.
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 84학번인 이 사장은 강연 초두에 “지금은 반도체 회사 사장이지만 살면서 메이저가 된 기억은 없었다”고 했다. 대학 전공은 전자공학이 아니었고, 석사논문도 비반도체였다는 것이다. 그는 “병역특례로 입사한 첫 직장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에서도 연구소가 아니라 공정기술부에 배치받았고, 심지어 첫 인사평가는 ‘C등급’이었다”고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
마이너였던 이 사장은 어떻게 메이저로 올라섰을까? 그는 “기숙사에 살면서 매일 새벽까지 반도체 관련 해외 논문과 자료를 읽었다”고 했다. 처음 논문 한 편을 읽는 데 1주일 이상 걸렸지만 나중엔 퇴근을 앞둔 짧은 시간에도 한 편을 읽는 수준까지 올라 200편 이상을 읽게 됐다고 했다. 이런 논문 읽기 덕에 입사 5년차 대리 시절 현대전자 창사 이래 처음으로 반도체 디바이스 국제학회인 IEDM에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세계 최고 반도체 기업인 인텔에 입사했다.
이 사장은 인텔에서도 여전히 마이너였다고 한다. 반도체 트랜지스터 개발업무 대신 ‘몸만 힘든 부서’에 배치받았다. 그는 또 지독하게 공부했다. 이 시절 얻은 이 사장의 별명은 ‘회사에서 먹고 자는 사람’ ‘맡은 일은 깔끔하게 완결하는 사람’이었다.
1년에 최고기술자 한 명에게만 주는 인텔 기술상(IAA)을 세 번이나 받은 이 사장도 ‘인텔을 그만둬야 하나’라는 좌절의 시기가 있었다. “8인치 웨이퍼(반도체 원판)를 12인치로 전환하는 시점에 12인치 웨이퍼 팹(fab)에 배치받았습니다. 그런데 웨이퍼가 계속 깨지는 현상이 발생했죠. 회사에선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원인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회사와 차로 15분 거리에 집이 있던 이 사장은 한밤중에라도 문제가 생겨 삐삐가 울리면 달려가야 했다. 거의 매일 그렇게 하다 보니 회의가 밀려왔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 사장은 “모든 장비의 문제와 해결책을 사내 인트라넷에 공개해 모든 사람이 해결할 수 있도록 프로세스를 개발했다”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몸이 고된 이 일은 내게 엄청난 축복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온라인에 접속한 대학생들에게 “아마도 졸업 후 접하게 되는 대부분 일은 단순하고 몸만 고된 일일 수 있다”며 “하지만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위기가 축복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사장은 KAIST에서 교수로 근무하다 2013년 SK하이닉스 미래기술연구원 원장으로 입사한 후 2년마다 승진을 거듭했다. 2014년 DRAM개발사업부문 부문장, 2016년 사업총괄 최고운영책임자(COO), 2018년 12월에는 SK하이닉스의 CEO가 됐다. 이 사장은 “제가 꽃길만 걸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다시 날마다 일어서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래 사회는 쉽게 풀 수 없는 문제의 연속”이라며 “어떻게 어려운 문제를 풀까를 고민하고 때론 주위 선배들께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후배들이 되길 바란다”며 강의를 맺었다.
공태윤 기자 true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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