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 색의 동그란 물감 자국이 무수히 포개져 뒤엉킨다. 수많은 방울이 서로 어울리는 모습은 현미경으로 본 미생물 군집에서부터 별들이 모인 성단의 장대함까지 우주의 다양한 면모를 연상케 한다. 원들의 색채와 조형에서 느껴지는 리듬에서는 수학의 프랙털 도형과 음악의 평균율 등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가 어른거린다. 그러다 방울들의 경계에 시선이 꽂힌다. 방울들은 서로 영역을 침범하며 하나하나를 정확히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불완전한 형태가 되지만, 이로 인해 더 아름다운 조화가 탄생한다. 억조창생(億兆蒼生)의 생명 그 자체를 보여주는 황호섭 화백(66)의 ‘Stardust(스타더스트)’ 연작이다.
황 화백의 추상화 49점을 소개하는 개인전이 26일 서울 한남동 갤러리 BHAK(옛 박영덕화랑)에서 개막했다. 작가는 캔버스에 떨군 물감 방울들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물로 씻어낸다. 테두리만 남은 방울들의 원형 위에 다시 물감을 얹고 말리고 씻어내기를 반복한다. 작품에 즉흥성과 영감을 가미하면서도 섬세함을 살리기 위한 작업이다.
인쇄물이나 컴퓨터 화면으로 보면 일반적인 단색화처럼 보이지만, 작품의 진가인 역동성은 실제로 봤을 때 드러난다. 켜켜이 쌓인 물감의 미묘한 질감은 색채에 따라 세상의 전혀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검붉은 색조의 그림에서는 수십억 년 전 뜨거웠던 지구에서 처음 생겨 퍼져나가는 최초의 생명체들이, 코발트블루 색조의 작품에서는 푸른 대양 위 영원히 부글거리는 물거품이 떠오른다.
황 화백의 오랜 친구인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의 피에르 캉봉 수석큐레이터는 이번 연작을 ‘현대적인 산수화’라고 표현했다. 산수화가 계절의 변화를 통해 대자연의 섭리를 담아낸 것처럼 우주의 섭리에 따라 변화하는 시공간과 생명이 화폭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황 화백은 경력과 국제적인 명성에 비해 국내에선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화가 인생 거의 전부를 프랑스 파리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한 20대 유학생이던 1984년 파리 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 졸업전에서 당시 유럽 최고 갤러리스트였던 장 프루니에의 눈에 들면서 프랑스 예술계의 주요 작가 중 한 명으로 발돋움했다. 1980~1990년대에는 프랑스 최고 화랑인 장푸르니에갤러리 전속작가로 활동하며 파리 뉴욕 도쿄 서울 등 국내외 유수의 화랑에서 100회에 가까운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었다. 프랑스 문화부가 지원하는 작업실도 제공받았다. 황 화백은 이 같은 영향력을 기반으로 다른 한국 화가들을 세계 예술계에 알리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작품성을 높이 평가한 김환기 화백의 부인 김향안 여사를 비롯해 박명자 갤러리 현대 회장, 정기용 원화랑 회장, 윤영달 크라운해태홀딩스 회장 등이 그를 파격적으로 지원했던 건 전설적인 에피소드다. 1995년 뉴욕 전시 때는 고(故) 백남준 선생이 뇌졸중으로 투병 중인데도 휠체어를 타고 나와 그를 격려했다. 현재 그의 작품은 파리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까르띠에재단, 국립현대미술관진흥재단, BNP파리바은행, 휴렛팩커드재단과 서울의 국립현대미술관, 환기재단, 서울·대구시립미술관 등 다양한 기관에 소장돼 있다.
전시 제목이자 연작의 제목인 ‘스타더스트’는 우리말로 하면 ‘별의 먼지’다. 황 화백의 역동적인 추상 표면에서 빛나는 철분, 금가루, 은가루, 운모, 망간 등 다양한 광물성 안료들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과 물질이 별의 잔해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상기시킨다. 전시는 6월 12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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