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 보면 일본은 끝난 것 같지만 다른 측면도 많다. 일본 기업의 활발한 해외 인수합병(M&A)부터 그렇다. 한국이 잘 모르는 산업도 있고, 벤처투자가 한국의 서너 배란 통계도 있다. 금융혁신, 생산적인 교육개혁 논의도 이뤄지고 있다, 사회적 모럴과 일하는 방식의 변화도 눈여겨볼 점이다. 일본 경제의 몰락 규정이 단편적이란 지적이 나올 수 있는 대목들이다.
이런 일본이 미·중 충돌에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일본 싱크탱크 PHP(Peace & Happiness through Prosperity)종합연구소는 ‘전략적 불가결성(不可缺性)’ 개념을 제시했다. 일본이 아니면 안 되는 기술로 일본의 존재감을 보여주자는 전략이다. 전략적 불가결성을 가진 기술의 이전·협력으로 영향력을 높이고, 수출관리와 외자규제 등을 통해 기술관리를 강화한다는 외교·안전보장책이 들어 있다. 미·중 디커플링으로 미국 공급망이 위협받으면 소재·부품·공작기계·검사계측기기 등의 기술을 활용해 동맹을 강화한다는 내용이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는 ‘글로벌 트렌드 2040’에서 강대국 간 블록화를 시나리오에 포함시켰다. 한·미 정상회담으로 한국이 미국 중심 블록에 한 걸음 다가섰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중국의 민감한 반응은 한국의 행보가 중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한국의 레버리지를 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는 반도체를 경제를 넘어 안보자산으로 가져가는 ‘실리콘 실드(silicon shield)’ 전략이 한국에 요구된다고 말한다. D램 메모리를 미·중 사이에서 한국의 전략적 불가결성 기술로 가져가자는 제언이지만, 한 가지 가정이 더 필요하다. 싫든 좋든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가 그것이다.
한국 반도체를 겨냥한 일본의 수출규제는 일본이 기술로 한국을 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한국은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로 대응하고 있지만, 모든 걸 전략자산화한다는 건 현실성이 없다. 상호의존성을 무기화하는 시대라지만, 상호의존성 그 자체가 아니라 힘의 우위를 가르는 전략자산의 ‘비대칭성’이 본질이다. 핵심 전략자산을 확보하는 기술전략과 함께 외교로 상호의존성을 관리해나가는 것 말곤 다른 방도가 없다.
일본에 대한 전략적 관리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한국이 미국 중심 블록에 들어가도 일본의 수출규제 위협이 해소된다는 보장이 없다. 일본이 지정학적 이해를 같이하는 블록 안에서도 외교 안보상 갈등이 생기면 한국을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으로선 전선이 넓어질수록 미·중 사이에서 생존을 담보할 전략적 불가결성 기술 확보에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래지향적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중 충돌이 장기화되면 기존의 전략적 불가결성 기술만으론 불안하다. 한국과 일본은 인공지능(AI)·에너지·바이오·우주·신소재 등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새로운 전략적 불가결성 기술을 확보해야 하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다. 갈등보다 협력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동북아 경제구도에서 한·일 공동보조는 중국에 대한 레버리지를 배가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나아가 한국과 일본이 손잡고 미·중이 ‘강(强)블록화’가 아니라 경제교류를 유지하는 ‘약(弱)블록화’로 가도록 한다면 모두에 이익이 될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기술안보 시대에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를 관리하지 못하면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게 엄청난 기회비용으로 돌아온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이라도 대일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 한국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 정부가 협력관계 구축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한국 국민의 78%가 수긍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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