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100개 넘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공간과 전시품이 조악하다. 세제 혜택을 받거나 관광객 대상의 한 철 장사를 위해 지은 ‘이름만 미술관’이 많아서다. 2014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특집 기사로 “제주도에 박물관이 왜 이렇게 많은가”라는 비판 기사를 냈을 정도다. 이 때문에 제주에서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은 도민이나 관광객이 가볼 만한 미술관은 극히 드물었다. 이런 갈증을 씻어줄 뮤지엄이 지난달 24일 제주 서귀포에 문을 열었다. 서귀포 화순항 쪽에서 한라산으로 올라가다 보면 고요한 숲속 리조트 옆에 자리한 포도뮤지엄을 만날 수 있다. 저 멀리로는 깨끗한 바다가, 밤이면 하늘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별이 보이는 곳이다.
바통을 이어받은 건 2019년 휘찬을 인수한 SK그룹이었다. 루체빌리조트를 사들여 인근에 있는 계열사의 호텔 및 골프장과 연계하고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게 주목적이었다. 전망 좋은 다빈치박물관 부지는 카페나 식당으로 활용하기 제격이었다. 하지만 각종 미술관과 박물관을 운영 및 후원하는 등 문화사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온 SK는 이곳을 뮤지엄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개관일에 찾은 포도뮤지엄의 모습은 수도권 여느 미술관에 못지않은 시설과 규모를 자랑했다. 미술품 전시에 적합하도록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단행한 덕분이다. 지상 2층과 지하 1층, 연면적 2653㎡(약 804평) 규모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순수 전시공간을 440평 규모로 갖췄다. 메인 전시장인 1층에서는 탁 트인 층고가 돋보인다. 관람객으로선 쾌적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미술관은 다양한 설치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 티앤씨재단이 마련한 개관전 ‘너와 내가 만든 세상-제주展(전)’에 나온 권용주 작가의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은 높은 층고 덕분에 더욱 돋보였다. 높은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의 목 위로 얼굴 대신 연기를 내뿜는 긴 굴뚝이 올라와 있는 모습의 작품이다. 선동당한 피해자가 되레 이를 재생산하는 가해자가 된 모습을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관객들은 이 작품을 올려다보며 신체적으로 가벼운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낮은 층고의 일반적인 전시관에서는 얻기 어려운 효과다.
이번 전시는 한 달 만에 8000여 명이 찾는 등 반응이 뜨겁다. 김희영 티앤씨재단 대표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참여했다. 입장료는 성인 5000원, 청소년과 군인은 3000원인데 이달 말까지는 무료다. 전시는 내년 3월 말까지.
제주=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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