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극장판 개봉까지 올킬했다. 우선, 무리 지어 들어오는 20대 남성들, 딸을 데리고 온 아빠, 연인 그리고 혼자 당당히 자리한 중년여성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이 자리했으나 극장은 호젓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인의 아들이 세 번씩이나 보고 왔다는 ‘극장판 귀멸의 칼날:무한열차’ 이야기다. ‘귀멸의 칼날’은 일본에서는 물론 국내 개봉 후 바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 205만 명의 관객(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을 넘어섰다. 지브리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기록을 넘어 국내 개봉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3위다. 구독 중이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서비스에서 볼 것이 없어 애꿎은 리모컨만 눌러대며 방황할 때, 이 신상 애니메이션을 발견했다.
내 지난 선택 실패의 역사를 떠올리며 ‘누르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민할 때, 오른쪽 엄지에 확신을 준 것은 친구들의 입소문이었고, 황사에 단비처럼 오랜만에 며칠 밤을 새워 정주행했다. 나아가 극장판까지 보고 온 중년의 열성이라니.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1편 26부작의 원작은 일본 ‘주간 소년점프’에 연재됐던 고토게 코요하루의 22권짜리 만화다. 줄거리는 이렇다. 일본 다이쇼 시대, 가족과 산속에서 살며 숯을 팔던 소년 탄지로는 어느 날 집에 돌아와 혈귀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한 것을 발견한다. 바로 밑 여동생 네즈코만 혈귀로 살아남았는데 그녀는 다른 혈귀들과 달리 사람을 먹지 않고, 공격하지도 않는다. 탄지로는 가족의 복수를 위해 혹독한 훈련을 거쳐 혈귀를 잡는 귀살대 대원이 된다. 그리고 햇빛을 볼 수 없는 혈귀 동생을 궤에 넣어 어깨에 메고, 혈귀의 수장 키부츠지 무잔을 찾아 나선다.
‘귀멸의 칼날’의 기본 소재는 ‘복수’다. 그중에서도 ‘가족의 복수’는 무협만화 주인공의 가장 주요한 행동 동기로 많은 무협소설과 만화에서 반복돼 왔다. 가족을 위해 인간이 변형된 괴물인 혈귀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은 마치 좀비 무비처럼 우리에겐 익숙하다. 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폭발적 관심은 기본적인 작품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팬데믹 시대에 ‘나’ ‘우리 가족’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이라는 현재 상황과 그로 인한 집콕시대 환경이 흥행을 가속화한 결과로도 분석된다.
그런데 하나하나씩 혈귀를 해치우며 전투력도 상승해가는 무적의 탄지로도 극한 상황에서 회의한다.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난 늘 참았어. 난 장남이라서 참아냈지만 둘째였다면 못 참아냈을 거야. 난 장남이야, 장남이야”라며 인간적 두려움을 드러내지만 곧 가족을 위한 행위의 당위성으로 승화시킨다. 다른 한편 “혈귀도 추악한 괴물이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이었고, 그래서 “공허하고, 슬픈 생물”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악당에게서도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한 믿음’을 발견하는 주인공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끝없이 맑고 정의로운 소년에게서 인간미가 없어 보인다면 내가 너무 의심하는 자라 그럴까. 그러나 다행히도 탄지로의 회의가 ‘햄릿’처럼 이어지지는 않는다. 해치워야 할 악귀가 끊임없이 나타나니까!
‘가족 복수’ 역사의 대표작은 물론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다. ‘햄릿’을 안 읽은 독자는 있어도 그 유명한 ‘햄릿’의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못 들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인공인 햄릿은 덴마크의 왕자로, 죽은 선왕이 유령으로 나타나 동생에게 독살당한 자신의 복수를 당부한다. 선왕의 죽음 후 삼촌 클로디어스와 결혼한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에게 분노와 배신을 느낀 햄릿은 미친 척하며 이들의 음모를 파헤치고, 결국 모두가 죽는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
햄릿의 복수는 탄지로의 그것과는 다르다. 보다 근원적 복수 즉, 복수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고뇌가 담겨 있다. 그래서 햄릿은 행위에 앞서는 질문을 던지며 내적 갈등을 하는 것이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를 들고 고해에 대항해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셰익스피어 당시에도 유행이었던 복수극을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이 쓰이긴 했으나 당시의 복수는 탄지로의 복수, 즉 단순한 ‘되갚음’과 달리 ‘명예’에 직결되는 개념이었고, 이때 복수는 사회적인 개념이 된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돌팔매를 맞느냐, 끝장을 내느냐” 중 어느 것이 더 고귀한 것인지를 고민하는 햄릿의 행동의 귀결은 유추되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햄릿’은 단순히 주요 등장인물 모두가 죽어서가 아니라 주인공의 이 내적 갈등으로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로 불리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두 주인공의 행위 동기가 ‘장남들이 가족의 복수를 대신한다’는 것인데 적이 존재하는 위치가 다르다. ‘귀멸의 칼날’에 외부의 배신(적)이 있다면, ‘햄릿’에는 내부의 배신(적)이 있다. 싸우는 대상이 밖에 있는 탄지로가 판타지적이라면 싸우는 대상이 안에 있는 햄릿은 설정부터 비극성을 내재하고 있다.
몇백 년 전의 희곡인 ‘햄릿’의 내용이 지금도 낯설지 않은 것은 ‘인간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비극 명제로부터 기인하는 것일 게다. 그런 면에서 끝없이 맑은 탄지로-파란 하늘과 맑은 물만 있는 평화로운 탄지로의 내면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철저히 판타지적 인물이다. 주인공이 승리한다고 믿는 것이 판타지가 된 우리의 현실은 그래서 비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현대인도 복수를 꿈꾼다.
그러나 현시대 우리에게는 되갚아야 할 사회적 복수는 사라지고 개인적인, 너무나도 개인적인 일상적 비극과 그에 대한 소심한 복수가 그 자리를 대신한 지 오래다. 급작스러운 퇴사 통보로 내 섭섭한 분노를 불러낸 직원의 카톡을 잠깐 못 본 척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복수 같은 것 말이다. 오늘 나의 비극은, 책의 상태를 보아하니 소전서림에서 첫 번째로 ‘햄릿’을 읽은 자라는 것이다. 햄릿적 복수를 할 대상도 없는, 이렇게 오늘도 복수는 나만의 것이 된다. “생각 말자-약한 자여, 네 이름은 인간이로다.”(햄릿 1막2장 146행 변형)
황보유미 < 소전서림 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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