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老兵의 명예훈장에 담긴 메시지

입력 2021-05-27 17:10   수정 2021-05-28 00:05

94세의 예비역 육군대령 랠프 퍼킷. 70년 전 청천강 전투에서 중공군과 싸운 전공으로 백악관에서 명예훈장을 받았다.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 공산군과 혈투를 벌인 노병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퍼킷 대령을 내세웠을까? 그것도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이는 워싱턴이 치밀하게 계산한 전략적 이벤트다. 베이징과 우리에게 ‘한국전쟁의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중국은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미화한다. 미 제국주의자의 침략에 맞서 북조선을 구한 정의로운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완벽한 역사 왜곡이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한 것은 중국이 지원한 북한 공산군이었으며, 그 당시 한반도에는 미군이 없었다. 그리고 결코 승리하지도 못했으며 엄청난 침략의 대가를 치렀다.

중국에는 묘한 한반도 징크스가 있다. 역사적으로 압록강을 넘어 군대를 보냈다가 재미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구한말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속국 조선에 들어와 거드름을 피우다가 일본에 조선 출병의 빌미를 줬다. 결국 한반도에서 한판 청일전쟁을 벌이고 굴욕의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한반도 징크스에서 예외가 아니다. 유엔으로부터 침략자로 낙인찍혀 죽의 장막 속에 갇혀 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 명의 인민을 아사시키고, 문화대혁명의 대혼란에 빠져 국가 건설의 결정적 시간을 허비했다. 또 어처구니없게도 철수했던 미군을 다시 한반도로 불러들여 전 세계에서 베이징에 가장 가까운 평택 험프리기지에 주둔하고 있다. 미국과 패권을 겨루는 베이징엔 아주 거슬리는 군사적 압박이다.

우리의 중국에 대한 안이한 역사 인식도 바로잡아야 한다. 중공군은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의 영토를 침략했다. 더욱이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을 함락해 피란길에 오른 한국인에게 말 못할 고통과 피해를 줬다. 파죽지세로 평택까지 밀고 간 중공군 때문에 하마터면 대한민국이 지도에서 사라져 버릴 뻔했다. 일본은 과거 중국 대륙을 침략한 데 대해 어설프게나마 사과했다. 그렇다면 똑같은 논리로 중국도 대한민국을 침략해 한국인에게 고통을 준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위대한 중화제국의 부활을 내세운 베이징은 그간 대한민국에 대해 방심하고 오만했다. 오죽했으면 중국 외교장관이 대한민국 대통령을 툭툭 치고, 화웨이의 런정페이 회장은 “항미원조 전쟁에서 승리한 상감령 전투 정신으로 미국의 제재에 맞서겠다”는 망언을 했겠는가. 한 술 더 떠 적반하장으로 중공군을 대파했다고 해 이름 붙인 ‘파로호(破虜湖)’의 개명을 요구했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을 하고 롯데그룹을 내쫓아도, 한국의 친중세력만 관리하면 베이징의 우산 아래 머무를 줄 안 것 같다. 엄청난 착각이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아무리 집권세력이 친중이라도 국민 여론이 중국으로부터 등을 돌리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일부에서는 앞으로 중국이 거칠게 보복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치열한 미·중 패권전쟁에서 갈수록 외톨이가 돼가는 베이징으로선 마땅한 보복 카드가 없다. 섣불리 외교적 보복을 했다간 한국이 완전히 등을 돌려 일본, 호주와 같이 반중동맹에 들어갈 수도 있다. 경제적 보복 또한 사드 때와 같지 않다. 한국 기업을 잘못 건드리면 중국 제조업의 사활이 달린 반도체 공급에서 구멍이 뚫린다. 미·중 반도체 전쟁에서 그나마 중국이 기댈 수 있는 곳은 한국이다.

하지만 아직 두 나라 사이에는 관계 개선의 여지가 있다. 우선 6·25전쟁에 대한 잘못된 역사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베이징은 대한민국 영토를 침략한 것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사과해야 한다. 우리도 당당하게 중국에 이를 요구해야 한다. 역사의 잘못된 앙금을 풀어야 두 나라 국민이 마음의 문을 열고 협력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베이징이 구시대의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진작에 사드 제재를 풀고 한국인을 자극하는 오만함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5월의 ‘친미(親美) 이벤트(!)’가 워싱턴에서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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