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미세화로 승부를 보던 반도체 시장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칩을 더 작게 만들거나 더 큰 웨이퍼에 더 많은 회로를 새기는 데 집중하던 반도체 기업들이 다양한 기능의 반도체를 한 데 합치는 '패키징'에 관심을 돌리고 있어서다. 미세 공정 기술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데다 자율주행 인공지능(AI) 등 기술에선 반도체 집적도보다는 여러 반도체가 한 모듈 안에서 안정적으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중요해졌다.
반도체 집적도를 높이는 것은 전공정에 속한다. 하지만 기술 발전에 따라 반도체의 집적도를 높이는 무어의 법칙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평가다. 반도체의 핵심인 미세화가 이뤄질 수록 개발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어서다. 또 미세화 기술만으로 모바일 웨어러블 클라우드 인공지능 자동차 등 다양한 응용처에서 성능을 만족시키기 어렵게 됐다.
이에 따라 서로 다른 종류의 반도체를 수직 또는 수평으로 연결해 하나의 시스템 반도체를 만들어 내는 첨단 패키징 기술이 핵심 경쟁력이 되고 있다. 특히 최근엔 데이터 구축 뿐 아니라 효율적인 전력 공급, 데이터 처리 등 다양한 기능을 한 번에 구동시키는 것이 중요해졌다. 반도체 기업들이 패키징에 주목하는 이유다. 개별 반도체 회로(IC) 단위에서 다수의 IC와 여러 소자를 집적한 모듈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6일 비메모리 반도체와 메모리 반도체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는 기술인 ‘I-Cube4’를 공개했다. 비메모리 반도체인 로직칩과 메모리 반도체인 HBM(High Bandwidth Memory) 칩을 하나의 패키지로 구현하는 기술이다. 로직칩은 운영체계(OS)에 사용되는 반도체로 컴퓨터나 휴대폰의 ‘뇌’에 해당한다. HBM은 전송 속도를 높인 메모리칩이다. 성격이 다른 두 반도체가 들어간 I-Cube4는 빅데이터를 다루는 슈퍼컴퓨터, 인공지능(AI) 서비스를 제공하는 클라우드 서버 등에 적용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8월엔 업계 최초로 7나노 EUV(극자외선) 시스템반도체에 3차원 적층 패키지 기술을 적용했다. 이 기술은 전공정을 마친 웨이퍼 상태인 칩 여러 개를 위로 얇게 쌓아서 하나의 반도체를 만드는 기술이다. 칩을 평면이 아닌 위로 여러층 적층하면 단위 면적당 저장 용량을 극대화할 수 있다. 칩 면적이 줄어들면서 고용량 메모리 솔루션을 장착할 수 있어 고객의 설계 자유도를 높일 수 있다. 대만 TSMC도 일본에 반도체 설계 연구소와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설립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글로벌 패키지 시장의 규모도 커지고 있다. 2010년 400억 달러에 그쳤던 이 시장은 2025년 900억 달러까지 커질 것으로 추정된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문재인 대통령도 삼성전자 평택공장을 방문했을 때 '반도체 패키징'이 중요성을 언급했다"며 "패키징 시장에서 성장해야 미래 반도체 시장의 패권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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