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수의 21세기 아라비안나이트] 어정쩡한 휴전과 팔레스타인 비극의 악순환

입력 2021-05-31 18:00   수정 2021-06-01 08:59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2000여 년 동안 다수의 아랍인과 소수의 유대인이 척박한 생태계를 공유하면서 평화롭게 함께 살아왔다. 이렇게 오랫동안 두 이질적인 종족이 커다란 갈등 없이 공존해 온 인류의 역사를 찾기도 쉽지 않다. 반(反)유대주의가 팽배했던 유럽 사회는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의해 600만 명의 유대인이 사라지고, 슬라브인과 집시 등 또 다른 500만 명의 생명이 광기의 칼날에 희생되는 홀로코스트를 겪었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약 64만 명은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1948년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남의 땅이었다. 쫓겨난 난민과 터전을 빼앗긴 주민들의 처절한 생존권 투쟁은 막강한 군사력에 막혀 번번이 좌절됐고 다수의 무기력한 체념과 소수에 의한 복수의 응징이 일상화됐다.

1967년 전쟁 때는 이웃 아랍국가들이 지배하는 영토마저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지중해 쪽의 가자지구, 요르단과의 경계에 있는 웨스트뱅크가 대표적이다. 전쟁 직후 국제사회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만장일치 결의안 242조, 338조 등을 통해 이스라엘의 즉각적인 점령지 철수와 영토 반환을 결의했다. 그러나 결의안은 54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이스라엘을 탱크 한 대 없이 몰아낼 방도는 없다. 결국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1993년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현실을 택했다.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두 국가로 함께 ‘공존·공생·공영’하자는 오슬로 평화협정이 그것이다. 테러리스트의 대부로 불렸던 아라파트는 다음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세상은 진정한 박수를 보냈고 중동에는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점령지에서의 유대인 정착촌 철거,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동예루살렘 귀속권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해결하지 못한 오슬로 평화협정에 많은 팔레스타인 정파가 들고 일어났다. 특히 가자지구의 하마스가 강력히 반대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이스라엘에서도 강경 우파정권이 연이어 집권하면서 오슬로 평화협정은 거의 사문화됐고 그 정신은 퇴색됐다. 하마스가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이스라엘과의 무장 투쟁을 본격화하게 된 배경이다.

지난달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많은 인명 피해와 가자지구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어정쩡한 휴전으로 막을 내렸다. 그들은 언제든 다시 맞붙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마스는 가자지구 200만 주민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자치정부다.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를 맡기도 했다. 하마스의 생존 비결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스라엘의 부당한 팔레스타인 정책이다.

이스라엘 내에서 2등 시민으로 살아가는 아랍인 주민들의 고립과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 등 이스라엘 점령지 내에서의 아랍인 차별 및 분리정책은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에 빗대 ‘21세기 아파르트헤이트’로 불릴 정도다. 신분증의 차별적 구분, 이스라엘 정착촌 확대와 팔레스타인 영토 잠식, 밤낮을 가리지 않는 검문검색, 웨스트뱅크를 둘러싸고 있는 분리 고립 장벽, 저임금 노동력 착취 등 헤아릴 수 없는 차별과 통제가 가해지고 있다. 국제사회는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는 이스라엘 당국을 향해 지속적으로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2007년 존 두가드 유엔 인권위원회 팔레스타인 특별보고관이 점령지에서 인종차별과 고립정책을 고수하는 이스라엘 당국을 국제사법재판소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나, 지난 4월 휴먼라이트워치가 이스라엘의 차별 행위를 아파르트헤이트로 보고 국제형사법정의 조사를 요구한 일 등이 좋은 예다.

팔레스타인 비극의 본질은 인류 역사상 최대 피해자인 이스라엘이 또 다른 가해자가 돼 제3의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긴 역사를 통해 수많은 피해자로 살아온 우리는 유엔안보리 결의안, 제네바협정, 헬싱키인권선언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 기준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누구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방관자가 아니라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중재자로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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