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균열서 출렁댄다, 거장의 심장박동

입력 2021-05-31 18:13   수정 2021-06-01 00:20


멀리서 보면 허여멀건한 캔버스에 자를 대고 선을 직직 그은 것 같다. 벽지나 모눈종이 같기도 하다. 하지만 거대한 작품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면 한참 동안 그 울퉁불퉁한 표면과 색을 들여다보게 된다. 위로 솟고 아래로 깎여 나간 캔버스 표면, 골을 메운 물감이 어우러져 형성된 격자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다. 표면의 균열은 수많은 생명의 흔적을 지닌 지층의 단면을, 오묘한 흰빛은 낡은 삼베옷이나 빛바랜 백자의 신비로운 빛깔을 연상케 한다. 정상화 화백(89·예술원 회원)의 2019년작 ‘2019-10-15’(사진)다.

한국 단색조 추상회화의 거장인 정상화 회고전이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1953년 서울대 입학 후 그린 자화상부터 2010년대 그린 대형 회화까지 정 화백이 평생에 걸쳐 만든 작품과 자료 10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전시다.

정 화백은 1967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이후 1992년 영구 귀국하기까지 주로 파리와 일본 고베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화가 인생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낸 탓에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 않지만 그가 구축한 작품 세계는 독보적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일본 도쿄현대미술관, 아랍에미리트 구겐하임 아부다비 등 국내외 유수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2015년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는 그의 작품이 11억4000만원에 낙찰돼 화제를 모았다.

정 화백을 상징하는 ‘격자형 추상회화’를 만드는 과정은 고령토를 물에 섞어 캔버스에 얇게 바르는 데서 시작된다. 3~5㎜의 두께가 될 때까지 이 작업을 10~12회 반복한다. 흙이 마르면 캔버스 천을 틀에서 떼어낸 뒤 뒷면에 자를 대고 연필로 선을 긋는다. 이 선을 나무 끌로 체중을 실어 눌러가며 캔버스를 접는다. 이렇게 만든 균열을 아크릴 물감으로 메웠다가 다시 덜어내기를 반복한다. ‘화면에 설득력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을 때’ 그의 작업은 비로소 멈춘다.

화폭에 길을 내는 작업은 고되다. 구순의 노화백에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조수는 절대로 쓰지 않는다. “내 노동을 쌓아 올려 만든 화면에 색과 밀도의 섬세한 변화를 만들고 이를 통해 우주를 드러내고 싶었어요. 다르게 보면 격자를 구획한 선은 내 실핏줄이고, 작품은 곧 내 심장이 뛰고 철렁대는 모습이지요. 작업을 오래 하면 자신만의 철학이 생기고 나의 모든 것이 작품에 나타납니다. 내 작품은 과정 그 자체예요.”

지금과 같은 단색조의 격자형 화면 구조가 확립된 건 1970년대 초반. 그는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을 위해 브라질에 들렀다가 인부들이 돌을 네모나게 잘라 길을 만드는 모습에서 자연을 개척하는 인간의 힘을 느꼈다고 했다. “그 장면이 어릴 적 어머니가 한복을 지으며 천에 주름을 잡고, 밥을 지으며 도마 위 무를 가지런히 자르던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이후 다양한 실험을 거쳐 지금의 ‘뜯어내고 메우는’ 기법이 완성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물감을 던지고 뭉개버리며 뜨거운 에너지를 표출했던 1950년대의 초기작, 1969~1977년 일본 고베에서 그렸던 도형을 사용한 추상화 등 60여 년간 구축한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전시관 입구에서 상영되는 인터뷰 영상에 녹아든 그의 예술 철학이 감동을 더한다. “나는 전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작가라면 작품이 삶의 일부가 되는 게 당연해요. 작품을 보고 이런 작가가, 이런 영감쟁이가 있었다고만 기억해주면 족합니다.” 전시는 9월 26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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