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진의 논점과 관점] 권력의 하산길

입력 2021-06-01 17:17   수정 2021-06-02 00:09

영화 ‘에베레스트’(2015)는 1996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참가한 저널리스트 존 크라카우어의 저서 《희박한 공기속으로(원제: Into Thin Air)》를 원작으로 해 만든 작품이다. 그해 5월 산악인 20여 명이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섰다가 그중 5명이 하산 도중 사망한 실화를 다뤘다.

영화에선 우편집배원 더그 한센의 스토리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 두 번이나 정상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그는 정상을 몇 백m 앞둔 상황에서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면서도 정상 정복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한다. 가이드가 “지금 하산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만류했지만 끝내 정상행을 고집한다. 그는 정상에서 웃지만 결국 체력 소진과 산소 부족, 추위로 하산하다 그와 동행한 가이드와 함께 유명을 달리한다. 영화의 메시지가 ‘인간의 욕망이 부른 비극’이라는 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통일 이슈 시간·비용 많이 들어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통일’이라는 정상 앞에서 발길을 돌린 아픈 기억이 있다. 2018년 판문점과 통일각, 평양을 오가는 세 차례의 남북한 정상회담과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사실상 주도하며 통일을 곧 손으로 잡을 듯했을 것이다. 남북 화해 모드에 언론은 우호적이었고, 지지율은 임기 초처럼 80% 가까이 치솟았다. 모든 게 환상적으로 진행됐다. 적어도 이듬해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미·북 정상이 인사도 없이 짐을 싸기 전까지는 말이다.

누구나 오르지 못한 정상 정복에 대한 갈망이 있다. 문 대통령이 최근 다시 통일 이슈에 불을 지피는 것도 그런 차원일지 모른다. 정권 재창출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겁먹은 개’ ‘특등 머저리’ ‘태생적 바보’ ‘떼떼(말더듬이)’ 같은 모욕도 못 들은 척, 수백억원을 들여 지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해도 못 본 척한다. 그리고 미국에 가서 44조원짜리 투자 보따리를 풀고,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협력과 지지 약속을 받아냈다. 그는 “최고의 순방, 최고의 회담”이라며 크게 기뻐했고, 국가정보원장은 현재 일본과 미국을 열심히 오가며 ‘2018년 재연’을 준비 중이다.

산악인들은 8000m 이상 고지를 ‘죽음의 지대’라고 부른다. 산소는 평지의 3분의 1 수준이고 기온은 영하 30~50도까지 떨어진다. 이 지점에 이르면 정상 정복보다는 하산 대비를 더 하도록 철저하게 훈련받는다. 마지막 캠프에서 정상으로 떠날 때는 여분의 산소통을 챙겨 중간 지점에 놓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안전하게 하산하기 위해서다. 이를 무시하면 제2, 제3의 한센이 될 수밖에 없다.
꼭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해야
역사상 하산에 실패한 정치인이 많다. 미국에선 45명의 전직 대통령 중 6명이 재선에 실패했다. 대부분 첫 임기 말에 엉뚱한 데 힘쓰다가 그랬다. 제럴드 포드는 임기 말 닉슨 사면에 매달렸고, 지미 카터는 인플레도 못 잡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이란 주재 대사관 인질 구출 작전에 나섰다가 실패해 ‘무능 낙인’이 찍혔다. 도널드 트럼프는 코로나를 잡아야 할 시기에 주가 관리에만 신경 쓰다 민심을 잃었다.

통일 이슈는 매력적이고 화려하지만 시간과 체력 소진이 많다. 국정 동력을 집중해도 될까 말까 한 어려운 과제다. 임기 1년도 안 남은 시기에 욕심낼 이슈가 아니다. 그보다는 코로나 백신 접종과 부동산 안정, 일자리와 청년실업 등 당장 챙기고 신경 써야 할 현안이 많다. 거기다 하산길 곳곳에 원전 경제성 조작, 울산시장 선거개입, 라임·옵티머스 사태 등 적잖은 사고 위험 요인까지 도사리고 있다. 하산길엔 ‘하고 싶은 것’보다 ‘꼭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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