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벤자민 버튼과 피터팬 증후군

입력 2021-06-01 17:50   수정 2021-06-02 00:06

‘일본에 벤자민 버튼이 등장했다.’ 중형 항공사 스카이마크, 회전초밥 체인 갓파크리에이트, 이자카야 프랜차이즈 다이쇼 등 일본 대기업들이 100억엔(약 1050억원) 안팎인 자본금을 1억엔 이하로 줄여 중소기업이 된 것이다. 일본에선 자본금 1억엔 이하여야 중소기업으로 인정된다. 코로나로 인한 경영손실을 견디지 못하고 몸집을 줄여 세제 혜택이 있는 중소기업이 되려는 것이다.

일명 ‘벤자민 버튼 증후군’이다. 판타지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주인공(브래드 피트)이 노인으로 태어나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데 빗댄 신조어다. 사실 이런 증상은 우리나라가 원조다. 중소기업이 성장하면 온갖 규제 대상이 되고 혜택이 줄어드는 탓에 사세를 키우길 기피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가상 세계인 네버랜드에서 자유롭게 누비며 어른이 되지 않고 영원히 아이로 남은 피터팬에 빗댄 ‘피터팬 증후군’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중소·중견기업이 글로벌 대기업(자산 10조원 이상 기준)이 되려면 ‘아홉 번 죽음의 규제’라는 크레바스를 건너야 한다. 중소기업 기준인 ‘자산총액 5000억원 미만’ 허들을 넘는 순간 81개 규제가 추가된다. 달리 적용받는 법률만 200건이 넘는다고 한다. 중소기업 특별세액감면에서 배제되고, 공공조달 입찰이 제한되고, 세무조사는 이전보다 한결 강해진다. 내달부터 5~49인 사업장에 확대 시행되는 주 52시간 근무제만 해도 30인 미만이면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주 60시간 추가 연장근로가 가능한 여지가 있다. 클수록 손해인 셈이다.

이런 판국이니 중소기업인이라면 어른이 되지 않으려는 피터팬의 마음을 백번 이해할 것이다. 결국 규제를 피하려고 기업 쪼개기와 인력 감축에 힘쓰게 마련이다. 그 결과 중견기업 수는 수년째 4000개 안팎을 맴돈다. 지난 20년간 중소·중견기업에서 대기업이 된 경우는 네이버, 카카오, 하림, 셀트리온 정도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벤자민 버튼 증후군 사례가 목격된다. 중견에서 중소기업으로 ‘나 돌아갈래’를 외치는 것이다. 작년 초 중견기업연합회 조사에서 종사자 50~200명 기업의 8% 정도가 ‘중소기업 회귀’를 실제로 검토했다고 한다.

이래서는 성장잠재력이 갈수록 위축될 수밖에 없다. 어디서부터 이런 문제가 생겨났는지 정부와 국회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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