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학자인 김위찬과 르네 마보안이 공동 집필한 《블루오션 전략》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레드오션(red ocean·붉은 바다)은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산업을 뜻하며 이미 세상에 알려진 시장 공간이다. 블루오션(blue ocean·푸른 바다)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모든 산업을 나타내며 아직 우리가 모르고 있는 시장 공간이다. (…) 블루오션은 미개척 시장 공간으로 새로운 수요 창출과 고수익 성장을 향한 기회로 정의된다.”
미술에서도 블루오션 전략을 구사해 경쟁자가 없는 시장을 창출한 화가가 있다. ‘가장 위대한 정물화가’ 중 한 명이라는 찬사를 받는 프랑스 화가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1699~1779)이다. 샤르댕이 활동하던 시절 막강한 권위를 가진 프랑스 아카데미는 그림의 주제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규칙을 정했다. 최고 등급은 역사화, 다음은 초상화, 풍속화, 풍경화, 정물화 순으로 서열이 정해졌다. 왜 역사화는 미술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정물화는 홀대받은 것일까. 아카데미는 국가 지원으로 운영되는 미술교육기관이었다. 미술을 통해 국가의 영예를 드높이고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설립 목표를 달성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역사화는 인간의 특별함과 도덕적 위대함을 보여주는 역할을 맡았다. 이런 역사화를 잘 그리려면 실기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종교사, 고전, 신화 등과 관련된 지적 소양도 동시에 갖춰야 했다. 그런 이유에서 역사화는 최상급 대우를 받았다.
초상화는 인간의 형상을 묘사했기 때문에 상위 등급을 받았다. 반면 세속적 주제인 풍속화와 인간의 지배를 받는 자연이 주제인 풍경화는 하위 등급으로 분류됐다. 일상의 사물, 과일, 꽃 등 움직이지 않는 (죽은) 대상이 주제인 정물화는 최하위 등급이었다. 당시 모든 화가가 역사화가로 성공하는 꿈을 꿨다. 역사화가로 명성을 얻으면 작품 주문이 많이 들어오고 그림도 비싸게 팔 수 있었다. 화가들에게 역사화는 출세의 지름길인 동시에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이었다.
샤르댕은 다른 화가들과 정반대 길을 걸었다. 그는 1728년 아카데미 미술분과 회원이 될 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화가였지만 소외 장르인 정물화를 선택했다. 현존하는 시장에서 수요자를 찾지 않고 경쟁자가 없는 블루오션을 창출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샤르댕은 역사화를 그리며 터득한 아카데미 표현 기법을 정물화에 적용해 역사화보다 더 높은 가격에 판매했다. 파리를 넘어 스웨덴,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유럽 전역의 왕족과 귀족들이 그의 정물화를 구입했다.
샤르댕이 1761년에 그린 ‘물잔과 커피포트’는 그의 정물화가 왜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콘크리트 선반에 평범한 부엌 용품들이 놓여 있다. 불에 타서 그을린 흔적이 보이는 구리 소재의 커피포트와 물을 담은 유리잔, 그 사이에 통마늘 세 개, 옆으로 나뭇잎을 배치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은 작고 하찮은 사물들을 그렸는데도 고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과 매혹적인 색의 조화, 부드러운 빛의 효과 등 아카데미 표현 기법으로 사물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자. 사다리꼴 형태의 커피포트는 아랫변이 윗변보다 길고 같은 형태의 유리잔은 윗변이 아랫변보다 길다. 커피포트는 무겁고, 불투명하고, 따뜻하고, 거칠고, 빛을 흡수하는 반면 유리는 가볍고, 투명하고, 차갑고, 매끄럽고, 빛을 반사하는 성질을 가졌다. 또 기하학적 형태의 단단한 식기 사이에 부드럽고 둥근 형태의 부서지기 쉬운 껍질을 가진 통마늘 세 개를 배치해 서로 대조되는 두 가지 특성이 상호 조화를 이루도록 연출했다. 그 덕분에 화면에 균형감, 통일감, 리듬감이 생겨났다. 선반 기울기와 반대 각도로 녹색식물 줄기를 비스듬하게 배치해 화면에 변화와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평범한 사물들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도록 한 샤르댕의 정물화는 많은 예술가와 문인들을 매혹시켰다. ‘공쿠르 형제 작가’로 유명한 에드몽과 쥘 공쿠르는 “회화의 역사에서 보조 역할에 그쳤던 정물화를 가장 놀라운 조건으로 키워 예술의 가장 높은 수준으로 격상시켰다”고 했고,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샤르댕에게서 평범한 도자기가 귀중한 보석만큼 아름답다는 것을 배웠다”고 격찬했다. 또 마네, 쿠르베, 반 고흐, 세잔, 마티스, 피카소 등 미술사의 거장들이 샤르댕의 정물화를 탐구했다.
이명옥 < 사비나미술관 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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