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죽어가던 산업정책을 일깨워준 건 엉뚱하게도 한국 반도체를 겨냥한 일본의 수출 규제였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으로 시작한 소득주도성장과 환경·안전·노동 규제 등을 내세워 반(反)기업·산업으로 질주하던 정부로 하여금 위기감을 들게 했다. 정부는 외교정책 실패를 대일 감정에 편승한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투자로 가렸지만, 그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집권여당은 한·일전 승리 운운하지만 일본은 수출 규제의 칼을 아직 빼지 않았다. 산업정책은 통상외교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 전략게임으로 가고 있다. 대일 통상외교는 한국이 소·부·장 중에서도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 카드다. 문재인 정부는 이 부분을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다.
산업정책에 눈을 돌리게 한 또 하나는 미국과 중국의 충돌이다. 미·중이 블록화 경쟁으로 치달으면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불가피하다.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글로벌 공급망의 관문 역할을 하는 ‘전략자산(choke point)’ 확보가 필수적이다. 새로운 산업혁명을 이끄는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반도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시장이냐, 미래 핵심 기술이냐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후자일 수밖에 없다. 시장은 또 찾으면 되지만 기술에서 밀리면 답이 없다. 기술혁신을 선도할 수 있는 블록에 줄을 서야 하는 이유다. 한국이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맞는 방향을 잡은 것은 다행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압력에 한국이 삼성 등 4대 그룹을 동원해 44조원에 달하는 투자를 갖다 바쳤다지만, 그렇게만 볼 게 아니다. 한국이 미국의 요구사항을 수용하면서 챙긴 성과에 미·중 충돌 상황에서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기’로 찾아온 행운까지 종합하면 한국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얻는 게 더 많을 수 있다. 미사일 사거리 제한 종료, 코로나19 백신 협력, 기후 공동 대응, 반도체·전기차 배터리 등 공급망 손잡기를 넘어 AI, 개방형 무선접속기술(오픈랜) 기반 차세대 통신, 양자기술 등 신흥 기술 파트너십 합의는 미래를 위한 발판이란 점에서 특히 그렇다. 여기에 우주 협력과 탈원전 정책을 만회할, 미국과의 해외 원전시장 공동 참여까지 더해졌다.
기회가 온 것과 기회를 잡는 것은 다른 얘기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미국이 중국을 겨냥한 쿼드 참여국 모두와 이런 식의 전략적 연대를 펼치고 있어서다. 한·미 정상 선언문이 미·일 정상 선언문보다 길다지만, 일본이 미국과 이미 시작한 ‘새로운 경쟁력과 공급망 회복력 파트너십’ ‘기후 파트너십’은 별도로 첨부돼 있다. 미·일 혁신동맹의 범위가 넓고 내용도 구체적이다. 대만까지 파트너십에 넣겠다는 게 미·일의 전략이다. 한국이 미국 중심 블록 내에서 일본·대만 등과 어떤 관계로 가느냐, 기술·기업 등 전략자산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그 위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변수는 또 있다. 일본 반도체 쇠락의 신호탄이 된 ‘미·일 반도체 협정’에서 보듯이 미국은 동맹국이라도 특정 국가의 특정 기술 독점을 좀체 용납하지 않는다. 새로운 경쟁자를 만들거나 안전장치를 강구한다. 미국의 이런 전략은 과거 한국 반도체가 일본을 넘어서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됐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대만 TSMC가 질주하는 가운데 삼성전자가 경쟁하고 있지만, 미국은 그래도 불안한지 이들 기업의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강자 자리를 굳히고 그 여세를 몰아 시스템 반도체까지 잡자고 하지만, 현실이 되면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는 또 다른 얘기다. 한·미 동맹은 그때 진짜 시험대에 오를지 모른다.
산업정책은 고도의 전략게임이다. 앞으로 100년을 좌우할 새로운 산업혁명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문재인 정부가 44조원 대미 투자로 4400조원을 벌어들일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그게 의문이고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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