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다시 소환된 '체르노빌 비극'

입력 2021-06-10 17:26   수정 2021-06-11 00:08

소형 원전(SMR) 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는 지난 2일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과 함께 SMR을 건설해 ‘에너지 산업의 게임 체인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SMR로 움직이는 선박을 띄웠다.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영국우주국(UKSA)은 SMR을 동력으로 쓰는 발사체를 개발 중이다. 차세대 원전 개발에 주요국들이 사활을 걸고 있다.

한국은 이런 흐름과 거꾸로 가고 있다. 환경단체 등으로 구성된 탈핵시민행동은 “SMR도 위험한 원전”이라며 8일 개발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또 “신한울 1호기 가동을 막겠다”며 11일 시위를 예고했다.

원전 공포감을 증폭시키는 매체도 등장하고 있다. SK브로드밴드는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다룬 영화를 최근 무료로 자사 인터넷TV(IPTV)에 공개했다. 피폭된 이들의 비극을 다룬 영화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진 영화 ‘판도라’와 비슷한 내용이다. 이달 말엔 체르노빌을 주제로 한 또 다른 영화가 개봉한다.

방사능 피폭은 끔찍한 재난이다. 원전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체르노빌은 핵분열로 가열한 증기로 직접 터빈을 돌리는 비등경수로(BWR)형 원전이다. 주요 시설이 방사능 범벅인 데다 격납용기도 변변찮아 사고가 났을 때 ‘대책이 없는’ 원전이다.

우리가 쓰고 있거나 개발 중인 원전은 안전성을 대폭 높인 가압경수로(PWR)형이다. 가압경수로 가운데 유일한 ‘멜트다운’ 사고인 1979년 TMI 원전 사고에서도 피폭자와 사망자는 없었다. 격납용기가 멀쩡했기 때문이다.

TMI와 체르노빌 사고를 계기로 각국은 원전 안전성 혁신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왔다. 사고 가능성 제로(0)를 목표로 2000년 ‘제4세대 원전 국제포럼(GIF)’이 발족한 배경이다. 2023년부터 2030년까지 SMR 시장이 만개할 것으로 GIF는 예상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원전이 위험하다는 주장은 5세대(5G) 이동통신 스마트폰을 쓰며 2G 피처폰 불량을 논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산업통상자원부, 환경부 등 각 부처 장관들은 “탈원전은 옳다. 대형 원전은 위험하니 SMR 수출만 하겠다”는 입장이다. 세계는 이미 저 멀리 앞서가고 있는데, 국내 기술과 산업 생태계 육성 없이 어떻게 수출을 하겠다는 건지 설명은 없다. 원전은 수백 년 쌓인 과학기술이 응축된 복합시설이다. 실존하는 첨단 기술과 영화적 감성을 냉정하게 구분할 줄 아는 각계 리더십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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