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이 사주신 삐삐가 시작이었어요. 곧 휴대폰을 갖게 됐고,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어디서나 SNS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용하는 SNS 종류도 버디버디에서 카카오톡으로, 싸이월드에서 인스타그램과 클럽하우스로 정신없이 변했어요. 소통하는 시간과 수단 모두 폭발적으로 늘어난 겁니다. 그런데도 마음을 주고받는 건 기술이 발전하기 전보다 더 어려워진 것 같아요. 직접 피부로 겪어온 이런 아이러니를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14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My own happiness’ 초대전을 연 지히 작가(본명 김지희·35)의 말이다. 갤러리 BHAK(옛 박영덕화랑)와 공동 기획한 이번 전시에서 그는 소통의 문제를 다룬 추상화 26점을 선보인다.
그라피티 거장 키스 해링(1958~1990)의 작품이 연상되는 그의 그림에서는 간결한 선과 강렬한 원색으로 표현한 갖가지 기호가 톡톡 튀는 매력을 선사한다. 왕관을 쓴 얼굴이나 종이 고깔처럼 보이는 도상은 입술을 표현한 것으로, 말하는 인간을 상징한다. 점은 언어를, 선은 생각을 나타내는 기호다. 이 세 가지 도상이 모이고 변형돼 하트와 눈, 점선 등 다양한 모양을 연출한다. 가볍고 밝은 분위기의 그림이지만 심오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도 해링의 작품과 닮았다.
“한국 미술사는 국권 침탈과 해방, 전쟁과 민주화 등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가 없어요. 당시 작가들은 격동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 미술의 정체성과 예술의 역할 등을 치열하게 고민했죠. 지금 젊은 작가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SNS 등 뉴미디어 기술의 발달로 인한 소통 문제를 떠올렸습니다. 인격이 형성될 때부터 새로운 소통 수단을 끊임없이 접하며 자라왔으니까요.”
무채색 그림인 ‘Someday6’에는 작가가 최근 SNS에서 느낀 문제의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흰색으로 채워진 입술은 공허함을, 복잡하게 꼬인 작은 선들은 언어가 되지 못한 생각의 파편들을 의미한다. “언어는 물론 표정과 제스처, 대화 장소와 그날의 온습도까지 모든 정보를 총동원해도 상대방의 진의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 하지만 SNS로 인해 서로를 이해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사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도요.”
작품만큼이나 작업 방식도 신세대적이다. 먼저 아이패드에 스케치를 하고 패널 위에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 마지막으로 오일파스텔을 사용해 포인트를 주거나 영어로 짧은 문구를 쓴다. 문구는 작품 주제에 대한 일종의 힌트다. 예컨대 ‘Ideal’ 그림에는 수많은 입술 모양과 선, 점이 구성하는 안정적인 화면 위에 제목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이상적인 소통을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작업 중에는 음악을 틀어놓는다. 최근에는 음성 기반 SNS인 클럽하우스를 주로 듣는다. ‘I feel alive’는 클럽하우스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이다. 질서 있게 배열된 입술 모양과 밝은 색깔의 점들이 활력을 선사한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나 명성과 관계없이 한데 모여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게 신기했어요. 비대면으로도 관계 형성과 친밀한 대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지요.”
그의 작품은 톡톡 튀는 매력 덕분에 패션이나 화장품 기업에 인기가 많다. 화장품 브랜드 미샤, 여성 브랜드 지컷(G-CUT)과 협업 상품을 내기도 했다. 전시는 오는 7월 9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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