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기간에 이만한 규모의 경판을 만든 것도, 지금까지 손상되지 않은 것도 기적입니다."
경남 합천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의 말이다. 지난 10일 경내 법보전 내부로 기자들을 안내한 자리에서였다. 법보전의 판가(板架)에는 770년 전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 경판들이 당시 모습 그대로 빼곡히 꽂혀 있다. 국난 극복을 기원하며 8만1340장의 목판에 일정한 서체와 크기로 정연하게 새긴 5200만여 자의 한자는 오랜 세월에도 획의 끝까지 온전했다.
몽골의 침략 극복을 기원하기 위해 1236~1251년 조성된 팔만대장경이 완성된 지 800여 년 만에 일반에 공개된다. 해인사가 법보전을 오는 19일부터 매주 토·일요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개방키로 하면서다. 각 시간대별로 사전 예약한 일반인 10~20명이 그간 일부 스님과 연구자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법보전 내부에서 팔만대장경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 현응 스님은 “국난 극복을 위해 만든 팔만대장경을 통해 코로나19 사태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안을 드리고 싶다”고 설명했다.
직접 둘러본 법보전 내부에서는 국난 극복을 향한 거대한 열망과 끈기가 고요하면서도 강렬하게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당시 목판과 벼루, 먹 등을 만들고 글씨를 쓰고 새기는 데 50만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방금 3D 프린터로 찍어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완벽하게 보존된 경판의 모습은 생생함을 더했다. 경판 표면은 인쇄할 때마다 밴 먹 덕분에 금속의 질감을 연상시키는 신비로운 검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법보전 안에 난 살창 앞에 서니 30도에 육박하는 바깥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혔다. 대장경판 보존국장 일한 스님은 “남쪽 벽의 창은 아래가 위보다 더 크고, 북쪽 벽은 위가 아래보다 더 커 공기가 실내로 들어와 잘 순환할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조선 세조 때인 1457년 지은 법보전은 경판 보존에 최적화된 과학적인 구조로 이름이 높다. 통풍은 물론 숯과 황토 등 자연 소재를 이용한 온습도 조절 장치 덕분에 지금도 전기 공조 설비가 일체 필요없다는 설명이다.
팔만대장경은 총 1500여종, 6000~7000권의 불경으로 구성돼 있다. 한반도는 물론 중국과 거란·여진·일본의 불교 경전 내용이 모두 담겨 있다. 이 중 대반야바라밀다경(반야심경)에는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란 유명한 구절이 수록돼 있다. 증일아함경이란 경판에는 통치자의 10가지 덕목이 언급돼 있다. 임금이 오래 권력을 유지하려면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작은 일로 해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고 충고한 게 대표적이다. 장아함경에는 제자와 스승, 아내와 남편, 친척을 대하는 태도 등이 적혀있다. 친척을 대할 때는 베풀고 착한 말을 쓰며 이익을 위해 속이지 않는 게 대표적이다.
“팔만대장경은 단순한 종교 유물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숭고함이 담겨 있는 인류 전체의 유산(遺産)으로 봐야 합니다.” 이날 만난 한 스님의 말이다. “일각에서는 팔만대장경의 종교적인 의미에만 주목하는데 안타까워요. 미술적 가치, 장경판전의 건축적 가치, 역사적 가치 등 그 외에도 수많은 가치들이 있는데…. 유럽의 대성당은 종교 유물이면서도 세계적인 관광지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고, 사람들은 종교를 떠나 대성당에서 감동을 느끼잖아요. 당시 사람들이 현실의 제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 모든 걸 쏟아부은 결과물이기에 감동을 주는 것 아닙니까. 팔만대장경도 국민들께서 그렇게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대장경 개방 행사에 참석하면 절 입구부터 스님들의 안내를 받아 해인사를 탐방한 뒤 법보전에서 15~20분간 팔만대장경을 보게 된다. 모든 탐방객은 카메라와 휴대폰을 비롯한 소지품을 사물함에 보관하고 법보전에 입장해야 한다. 반응은 폭발적이다. 지난 4일 예약을 개시하자마자 순식간에 7월 4일분까지 예약이 끝났고 홈페이지가 마비됐다. 해인사 관계자는 “문화재 보존과 일반 공개 사이 균형을 찾느라 시간이 조금 걸리고 있지만, 철저한 준비를 거쳐 곧 홈페이지 예약을 재개하겠다”며 "최대한 많은 국민이 팔만대장경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합천=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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