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지휘자 '후광'도 도움 안 된다지만…없어서는 안 되는 지휘봉 [김동욱의 하이컬처]

입력 2021-06-15 06:01   수정 2021-06-15 06:08


간혹 지휘봉 없이 맨손으로 지휘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현대의 대다수 지휘자는 지휘봉을 사용해 오케스트라를 이끕니다. 19세기 후반 한스 폰 뵐로가 지휘봉을 도입한 이래 지휘봉은 지휘자의 카리스마를 더욱 빛나게 하는 존재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 지휘봉을 만드는 업체에 관심을 돌린 경우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다니엘 바렌보임, 크리스티안 틸레만, 시몬 영 등 유명 지휘자들이 사용하는 지휘봉은 모두 같은 회사 제품이라고 하는데요.

독일 작센지방에서 1888년 이후 5대에 걸쳐 140여 년간 지휘봉과 각종 타악기 관련 스틱을 제조해온 헬링어 가문이 운영하는 가족회사 '로헤마(ROHEMA)'가 그 주인공입니다.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 등 독일 언론에 따르면 이 회사는 지휘봉과 각종 타악기 관련 스틱 제조업체로 명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유럽 유일의 지휘봉 제조업체이기도 합니다.

이 회사가 각종 타악기 스틱과 지휘봉 사업을 시작한 계기가 재밌습니다. 애초 작센 서남부 지역에는 북을 울리며 군대가 진군하던 풍습에 맞춰 드럼을 대량으로 제조하던 공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케스트라보다는 군부대를 주 고객으로 삼아 타악기 산업이 발달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악기 공장의 출발로는 예상 밖의 모습입니다.


동서 냉전 시기 동독 정부의 지시와 보호 아래 지휘봉 생산을 유지했던 헬링어 가문은 현실 사회주의 붕괴와 독일 통일 이후에도 꾸준히 사업을 유지해왔고, 현재도 '틈새 상품'인 지휘봉 사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지휘봉은 들이는 품에 비해 실질적인 이득은 거의 보지 못하는 사업이라고 합니다. 유명 지휘자가 이 회사 지휘봉을 사용한다고 해서 매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럽 각지에서 여전히 활동 중인 마을 오케스트라(Dorforchester)나 브라스밴드, 연극지휘자 등 소규모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대상으로 한 매출이 간혹 있을 따름입니다.

지휘봉이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매번 연주할 마다 지휘봉을 새로 구입할 필요도 없고, 닳거나 파손될 가능성도 거의 없습니다. 한번 사면 추가 구매할 필요가 거의 없는 셈입니다. 수요도 많지 않습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오케스트라 멤버 중 지휘봉이 필요한 사람은 지휘자 단 한 명뿐이며, 물량도 단 한 개면 족합니다. 지휘봉 가격이 비싸다고 더 좋은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이 회사의 주력 제품도 드럼 스틱, 팀파니 말렛, 비브라폰 말렛, 나무드럼, 탬버린, 팀파니 등 600여종에 달하는 타악기와 타악기 도구입니다.

코로나19확산에 따른 위기가 이 회사에도 닥쳤지만, 회사의 숨통을 틔운 것도 지휘봉이 아니라 어린이 음악교육용 드럼 스틱과 실로폰 등에 사용되는 스틱이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회사 매출에서 지휘봉이 차지하는 비중은 5%도 되지 않지만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지휘봉 사업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얼마 안 남은 극소수의 지휘봉 제조업체, 유럽 유일의 지휘봉 제조사라는 타이틀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모차르트,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등 유명 작곡가의 이름을 딴 모델을 비롯해 90여 개의 지휘봉 모델의 생산을 유지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화려한 지휘자의 동작에 눈길이 쏠리느라 지휘봉 자체는 큰 주목을 받아오지 못했습니다. 큰돈이 되지도 않고, 수요가 많지도 않지만 묵묵하게 지휘봉을 만들어오는 업체가 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케스트라에도, 사회에도 주목받지는 않지만 없어선 안 되고, 없으면 전체 운영에 큰 차질을 빚게 하는 존재가 있기 마련입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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