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글라스에 담긴 고급 포도주 한 잔을 표현한다고 가정해보자. 장담하건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의견을 낼 것이다. 이는 오감을 통해 형성한 이미지일 뿐, 실체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이런 인식의 한계에 대해 갈파했다. 우리가 대상의 실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인식이 대상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대학교 첫 학기 철학 강의에서 칸트를 처음 접하면서 충격받았던 기억이 난다(사실 교수님은 ‘눈으로 보이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셔서 혼란을 줬지만…). 이보다 훨씬 전에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 것(一切唯心造)”이라고 가르쳤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이런 철학적 논의가 오늘날 당연한 이치가 된 것은 뇌과학 덕분이다.
다섯 가지 감각(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을 통해 포도주를 즐김에 대한 인식이 이뤄지는 곳이 뇌다. 이때 오감을 통해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와인의 실체, 예컨대 와인을 구성하는 화학적 성분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 오감 기관의 작용도, 뇌에서의 감각 정보 처리 양상도 서로 다르다. 똑같은 포도주 한 잔에 대한 인식이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히 강한 정서적 경험을 동반한 기억은 아주 오랫동안 유지된다. 조건화 학습에 의해 형성된 공포기억이 대표적 예다. 마우스(쥐)에게 특정 환경에서 발바닥에 전기 충격을 주면, 이후 같은 환경에 처했을 때 공포가 되살아나는 것(동작이 얼어붙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공포기억은 오래 지속된다. 소방관이나 전쟁 귀환 군인에게서 간혹 생기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은 조건화 학습의 결과가 병적으로 오래 가는 예다.
기억의 생성과 왜곡을 뇌 속 해마(hippocampus)에서 관찰한 마우스 실험 결과가 있다. 특정 기억의 형성 과정에서 해마의 신경세포 일부가 기억세포로 전환된다. 따라서 기억세포를 활성화하면 특정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 원리를 이용해 기억세포를 조작해 기억을 변조할 수 있고,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 새로운 기억세포 생성을 유도하면 없던 기억을 심어줄 수도 있다. 마음 상태가 기억세포의 형성을 왜곡시킬 수도 있으리라 예상된다. 뇌과학이 이제 기억의 형성과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 학문적 가능성이 기대되지만, 한편으로 걱정되기도 한다. 예컨대 영화 ‘인셉션’이 보여준 기억 조작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나의 기억을 너무 확신하지 말아야 할까?
신희섭 < 前 기초과학연구원 연구단장·UST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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