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인도, 베트남, 러시아 등 신흥시장에서 ‘넘사벽’으로 불리던 일본 자동차업체를 속속 추월하고 있다. 인도에선 현지 진출 23년 만에 마루티스즈키를 제치고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도요타의 텃밭이었던 베트남에서는 2년 전부터 정상으로 올라섰다.
현지에선 현대차·기아가 동급 일본차보다 다양한 옵션을 갖춘 프리미엄 차종을 출시하는 현지 맞춤형 전략으로 시장 장악에 성공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차를 성장성 높은 신흥시장에서 압도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17일 인도자동차제조협회에 따르면 현대차·기아의 지난달 인도 시장 점유율은 35%로 1위를 기록했다. 전달 23%에서 12%포인트 급등하며 현대차가 1998년 현지 공장을 설립한 이후 처음으로 월간 1위를 차지했다. 40여 년간 최정상을 고수했던 마루티스즈키(인도 마루티와 일본 스즈키의 합작사)의 점유율은 같은 기간 47%에서 32%로 내려앉았다.
두 회사의 순위가 뒤바뀐 것은 현대차·기아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크레타, 셀토스, 쏘넷 등이 인기몰이를 하며 마루티스즈키 제품을 압도한 결과다. 여기에 인도 내 코로나19 확산으로 마루티스즈키 공장 가동이 차질을 빚은 영향도 더해졌다.
인도에서 처음 세단을 제조·판매한 마루티스즈키는 1981년 설립 이후 1990년대 말까지 시장 점유율 65% 이상을 꾸준히 기록했다. 이 같은 독주에 균열을 낸 차량은 2015년 출시된 현대차 크레타였다. 마루티스즈키는 그때까지 소형 세단을 중심으로 차량 라인업을 구성했고, 현대차는 SUV 판매를 늘렸다.
인도의 국민 소득 증가에 따라 가족 단위 이동 수요가 늘면서 SUV 판매량이 늘기 시작했고 크레타는 지난해 인도에서 9만6989대를 판매해 가장 인기 있는 SUV 자리를 차지했다. 올 들어서도 지난달까지 5만7342대가 팔리며 지난해 판매량의 60%에 육박했다.
마루티스즈키가 저가 브랜드에 머문 반면 현대차·기아가 중·고가 브랜드로 인정받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마루티스즈키의 강점인 비용 절감을 통한 ‘효율 경영’이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며 ‘일본차 위기론’까지 꺼내들었다.
러시아에서는 올 1~5월 현대차·기아가 크레타의 선전으로 16만1409대의 판매량을 올리며 도요타를 4배 이상 앞질렀다. 브라질에선 현대차·기아가 같은 기간 8만419대를 판매해 도요타(6만2094대)를 앞섰다. 현대차는 지난해 현지에서 전 차종에 걸쳐 판매 2위를 차지한 해치백 모델 HB20 신형을 최근 출시하며 점유율 확대에 나섰다.
아프리카 콩고에서는 지난달 현대차 팰리세이드가 경쟁 모델인 도요타 랜드쿠르저를 꺾고 500대 공급 계약을 맺었다. 민간 시장이 크진 않지만 콩고 정부가 팰리세이드를 대통령집무실 관용차로 쓴다는 점에서 시장 확대를 노려볼 수 있다는 관측이다.
미국에서는 혼다를 따라잡고 있다. 현대차·기아의 지난달 미국 판매량은 17만4043대로, 4위 혼다(17만6815대)와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에서의 판매 부진을 인도, 베트남 등에서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규 기자 khk@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