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6월 20일 14:41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최근 남양유업이 자본시장에서 상당한 화젯거리였습니다. 이 회사는 한때 시장의 리더였습니다. 하지만 10여년 전 대리점 상품 강매, 최근 코로나 관련 허위광고 논란 등 불상사는 잘 알려진 대로입니다. 오너 일가가 경영권 포기를 선언하였지만 결국 사모펀드의 손에 넘어가는 것으로 사태가 일단락되었습니다.
남양유업을 바라보며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자본시장의 변화, 둘째는 최고경영자의 리더십입니다.
자본시장의 변화는 규모가 상당하고 업력이 꽤 된 기업이 순식간에 대주주가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워렌 버핏의 인수방식 못지않았습니다. 버핏 옹은 현장실사와 금융 자문을 생략하고 전광석화처럼 딜을 종료하기로 유명합니다. 사모펀드의 남양유업 인수 뒷얘기는 차치하더라도 외견상 한국의 M&A 시장이 진일보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최고경영자의 리더십입니다.
얼마전에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는 선배 집에 놀러갔습니다. 조만간 머나먼 유학길을 떠날 딸에게 멋진 전원과 삼겹살 파티의 추억거리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남한강이 보이는 여주 시골집에 도착하자 선배 부부와 개들이 저희를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개울이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상차림은 우아하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숯불에 고기만 구우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파티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딸이 개에게 물렸습니다. 안주인은 단말마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고, 선배는 개를 제압하면서 제게 119를 부르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내는 팔뚝이 너덜대고 피범벅이 된 딸을 안았습니다. 딸바보 아빠는 온 몸이 떨렸습니다.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딸은 수술을 세 차례 거치며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황망한 일을 겪으면 깊은 트라우마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트라우마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선배의 모습 때문입니다. 첫째는 최우선의 판단입니다. 선배는 가장 가까운 서울 대형병원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아내나 저는 인근 병원으로 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선배로서는 무엇보다 딸의 상처를 제대로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런 상처 치료는 대형병원만이 치료 가능하고 지방 의료시스템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선배가 군 시절 스포츠 매니아로서 큰 부상을 자주 치료해본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신속성입니다. 선배는 순식간에 일어난 사태에 시간을 다투기 위해 구급차와 접선 장소를 정하였습니다. 선배는 고속도로 진입로로 내달렸습니다. 구불구불하고 좁은 시골길은 선배에게 익숙하지만 구급차에게는 익숙하지 않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구급요원들은 딸 상처 소독까지는 가능했지만 서울까지 갈 수는 없었습니다. 선배는 서울 아산병원까지 차를 몰았습니다. 그런 고속도로 질주는 난생 처음 겪는 롤러코스터였습니다. 운동 신경이 워낙 뛰어난 선배이지만 집중력이 초인적이었습니다.
셋째는 단호함입니다. 선배는 병원에 도착할 무렵 손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를 제압하면서 뼈가 부러진 겁니다. 딸 응급처치와 더불어 자신도 응급처치를 받고 수술 날짜를 잡은 후 시골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날이 어두워진 시골집엔 딸 바로 옆에 있었던 안주인이 넋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저는 선배 보호자로 동행해야만 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선배는 평생 이어왔던, 자식 같은 반려견 동거를 끝내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다음날 선배는 그 개를 안락사시켰습니다. 선배 가족은 울고, 딸은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넷째는 치유입니다. 그런 일을 두고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책임에 대한 시시비비입니다. 저희는 선배의 성정을 잘 압니다. 선배는 사려 깊고 철저합니다. 광견병 예방주사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평상시엔 넓은 마당을 가로지른 줄에 연결하여 개가 자유롭게 놀게 하다가 손님이 오면 묶어 둡니다. 개를 좋아하는 딸은 텃밭으로 가는 길에 꼬리치며 다가오는 개에게 별 경계심이 없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그런 상황을 이해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위급 상황에서 선배가 보여준 판단과 결행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안주인의 정신적 안정을 빌었습니다. 아내와 딸의 담대함은 선배 부부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선배 가족과 저희 가족은 서로 이해와 배려, 감사의 표시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살다 보면 사건은 예기치 않게 일어납니다. 삶이 계획대로 펼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기치 않은 불상사가 생겼을 때 대처하는 자세와 실행입니다. 남양유업은 물론이고 공기업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군대 성추행 모두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수면 아래에서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미봉책으로 인하여 작은 폭탄을 대형폭탄으로 키워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에서 불상사가 생기면 과감한 실행이 뒤따라야 합니다. 피해자에겐 지나칠 정도로 충분한 힐링과 배려가 필수입니다. 가해자에겐 가혹할 정도의 징벌이 따라야 합니다. 특히 가해자가 최고위층 측근일 경우 더욱 엄해야 합니다. 수직적 조직 문화는 문제 해결을 더 꼬이게 합니다.
요즈음 ESG가 화두입니다. 이젠 친환경이 대세라며 다들 환경 비즈니스에 혈안입니다.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지만 정작 조직 내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한 인지력은 떨어집니다. 지배구조 역시 형식이 아닌 실질이 중요합니다. 위기 때 최고경영자가 제 역할을 못하면 이 모두가 말짱 도루묵이 됩니다.
대기업은 문제가 생기면 당장은 괜찮겠지만 서서히 가라 않습니다. 중소기업은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변화가 빠르고 복잡한 세상입니다. 리더라면 “뭣이 중헌디”를 제대로 알고 과감하게 실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평생 직업군인으로서 경리병과 최고위직까지 올랐던 선배는 “미션임파서블”의 에단 헌트였습니다. 진정한 인간관계와 리더십은 위기 때 진가를 발휘합니다. 선배의 리더십을 가진 최고경영자가 간절해집니다.
*필자는 삼일회계법인과 산업은행 등에서 근무했으며 CKS파트너즈 대표를 거쳐 현재는 사모펀드 서앤컴퍼니의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습니다.《슈퍼파워 중국개발은행》(매경출판, 2014),《괜찮은 결혼》(지식여행, 2019) 등을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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