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사라진 여권

입력 2021-06-20 16:57   수정 2021-06-21 00:23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중국 입국 뒤 코로나 격리 시설에 수용된 우리 교민 31명의 여권이 당국자의 관리 소홀로 소각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쓰레기인 줄 알고 태웠다는 얘기도 황당하거니와 여권이 도용되거나 위·변조범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더 큰일이다.

분실·도난 여권은 불법 입국과 마약밀매, 위폐유통 등 국제적인 범죄에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잖아도 한국 여권은 범죄조직의 주요 타깃이 돼 왔다. 비자 없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국가 수가 189개국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를 기준으로 영국 자문회사 헨리앤드파트너스가 평가한 올해 ‘헨리 여권지수’에서도 한국은 독일과 공동 3위를 차지했다. 1위 일본(191개국), 2위 싱가포르(190개국)와 별 차이도 없다.

한국의 ‘여권 파워’가 강한 만큼 밀거래 가격도 비싸다. 미국 비자가 붙은 한국 여권은 3만달러를 웃돌 정도다. 그러니 절도·탈취·위조범들이 눈을 번득인다. 몇 년 전 스위스에서 한국 여권으로 입국하려던 중국인 16명이 한꺼번에 적발됐다. 해당 여권은 우리 관광객이 해외에서 도난·탈취당한 것이었다.

이 사건에는 중국 범죄조직 ‘삼합회(三合會)’가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과 손잡은 마피아가 중국인 5000여 명을 이탈리아로 밀입국시킨 적도 있다. 그때 많은 중국인이 한국 여권을 이용했다. 중국 취업을 미끼로 여권을 ‘일괄 관리’하던 중개인이 자취를 감춘 사건까지 있었다. 이 여권 중 일부는 국내로 들어오던 중국동포 손에서 발견됐다.

탈취당한 여권 외에 ‘단순 분실’로 신고된 여권도 한 해에 13만 건이 넘는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범죄조직의 ‘먹이’가 된다. 여권을 잃어버리면 이미 받은 비자를 재발급받아야 한다. 방문국의 대사관을 다시 방문하거나 불필요한 지출도 감내해야 한다. 이런 일이 잦으면 비자 발급에 불이익을 당하고 국가 신뢰도까지 추락한다.

요즘은 위조방지 기술이 좋아졌다지만 범죄기술도 날로 첨단화하고 있다. 코로나 백신 접종자에게 발급하는 ‘백신 여권’마저 도용과 위·변조 우려 때문에 각국 정부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최근 해외여행 기대감에 여행가방과 여권지갑을 사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는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중국 내 ‘여권 증발’ 사건 앞에 그저 할 말을 잃게 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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