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병 원사·탄소중립 원유....소재부터 ESG 입히는 기업들

입력 2021-07-12 06:01  

[한경ESG] ESG NOW


국내 최초의 민간 정유 기업인 GS칼텍스는 스웨덴 에너지 기업 룬딘이 노르웨이 요한 스베드럽 해상유전에서 생산한 탄소중립 원유 200만 배럴을 이달(7월) 중 선적할 예정이다. 오는 9월 국내에 도착하는 이 원유의 탄소배출량은 일반 유전 원유에 비해 40배 낮다. 글로벌 시험·인증 기관인 인터텍의 저탄소 인증을 획득한 이른바 ‘탄소중립’ 원유다.

탄소중립 원유가 국내에 들어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GS칼텍스의 하루 최대 원유 처리량은 80만 배럴로, 이번에 도입한 탄소중립 원유는 사흘 정도의 처리 물량이다. GS칼텍스 관계자는 “사흘 정도의 처리량이지만 국내 에너지 기업 중 처음으로 탄소중립 원유를 도입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친환경을 앞세운 ESG 경영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소재 생산 단계부터 ESG 경영 정착

전 세계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최대 화두로 떠오르면서 국내 기업들은 제품의 모든 생산 단계에서 친환경 기술을 적용하는 실험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최종 소비자들이 접할 수 있는 완제품뿐 아니라 제품 생산의 출발점인 소재부터 중간재, 부품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친환경 기술을 적용하겠다는 계획이다. 석유제품 원료인 원유뿐 아니라 의류 소재인 원사, 폴리우레탄 재료인 질산 등 분야도 다양하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플라스틱 제조다. 페트병과 비닐 등 각종 플라스틱 제품은 작은 플라스틱 조각인 플레이크를 가공해 만들어진다. 이 플레이크 단계부터 재활용 등 친환경 기술이 적용된다. 효성그룹의 화학섬유 계열사인 효성티앤씨는 지난해부터 전국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폐페트병 재활용 사업을 벌이고 있다. 버려지는 페트병을 수거한 뒤 이를 원료로 리사이클 섬유 브랜드인 리젠을 만든다. 가방 및 의류 제조업체가 이 섬유를 공급받아 가방을 제조하는 방식이다. 지난 5월엔 버려진 어망을 재활용한 나일론 섬유 ‘마이판 리젠오션’을 출시하기도 했다.

통상 의류는 화섬 업체가 제조한 원사를 토대로 직물, 편물 등 원단을 제조한 뒤 재단과 봉제 과정을 거쳐 최종 탄생한다. 원사 업체인 효성은 지금까지 나이키와 아디다스 등에 원사를 공급하는 역할만 했다. 굳이 친환경을 앞세워 소비자 요구까지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ESG 경영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단순한 원사 제조에 안주하다가는 글로벌 트렌드에서 낙오될 수 있다고 봤다. 고객인 글로벌 기업들이 소재 공급업체에도 친환경을 잇따라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화장품 업체인 로레알은 2030년까지 제품 포장을 위한 플라스틱에 100% 재생 원료를 쓰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코카콜라는 2030년까지 용기의 50% 이상을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활용하겠다는 방침이다. 나이키는 연내 50%, 아디다스는 2022년까지 100%를 플라스틱 재생 원료로 사용하겠다는 계획이다. 가장 밑 단계인 소재부터 친환경 기술이 적용돼야 소비자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친환경 제품이라는 판단에서다.

효성뿐 아니라 SK케미칼도 버려진 페트병을 수거해 자체 개발한 리사이클 원료인 ‘에코트리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에코트리아는 화장품 용기에 들어가는 투명 원료로 활용된다. 2012년 국내 최초로 사탕수수 등 식물성 원료에 기반을 둔 바이오 페트 개발에 성공한 롯데케미칼은 바이오 페트 시장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CJ제일제당도 올해 인도네시아에 연간 5000톤 규모의 바이오 플라스틱인 PHA 대량 생산체제를 구축할 계획이다. PHA는 바닷물에서 100% 분해되는 친환경 소재다. 삼양그룹 계열의 삼양이노켐은 올 하반기 바이오 플라스틱 원료 물질인 이소소르비드 공장 증설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프리미엄 소재로 신규 시장 창출

고객사 주문에서 비롯된 ESG 경영을 벗어나 소재 단계부터 자발적으로 친환경 기술을 앞세우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국내 질산(HNO3) 시장의 강자인 태광실업의 정밀화학 자회사 휴켐스가 대표적이다. 국내 질산 시장 점유율 90%가 넘는 휴켐스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에도 독보적인 생산능력을 앞세워 견조한 영업이익률을 보이고 있다. 휴켐스는 질산을 토대로 DNT, MNB, 초안을 생산한다. 질산에 톨루엔을 결합하면 DNT, 벤젠을 섞으면 MNB, 암모니아를 더하면 초안이 생성된다. DNT와 MNB는 자동차와 가구·건설 내장재로 쓰이는 폴리우레탄 재료로 활용된다. 초안은 반도체 세정제와 폭약 제조에 쓰인다. 휴켐스는 한국바스프, 한화, 한화케미칼, OCI 등과 장기 공급 계약을 맺고 질산을 공급하고 있다.

질산의 원료는 암모니아다. 휴켐스는 이 암모니아를 전량 수입한다. 휴켐스는 100% 재생에너지를 활용해 생산되는 암모니아를 들여와 이를 질산으로 만들어 기존 제품 대비 가격이 비싼 프리미엄 제품으로 공급하는 방안을 내부에서 검토하고 있다. 호주, 중동 등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지역에서 암모니아를 생산하겠다는 계획이다. 질산에 친환경을 입힌 이른바 ‘프리미엄 질산’이다. 휴켐스 관계자는 “내부 검토를 끝낸 후 고객사들과도 사전에 협의를 거쳐야 한다”면서도 “프리미엄 시장이 창출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본다”고 밝혔다.

원유와 질산, 원사 등 소재 단계부터 친환경을 앞세우는 ESG 경영은 앞으로도 더욱 확대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기업들의 고민도 적지 않다. 아직까지는 친환경 기술에 소요되는 비용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소재 단계부터 친환경 기술이 적용되면 제품 각 생산 단계에서 기업들이 자체 마진을 줄이지 않는 한 완제품 최종가격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효성의 친환경 섬유인 리젠으로 만든 의류는 기존 소재로 만든 제품 대비 30~50% 비싼 가격에 판매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친환경 제품 비중이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기업들이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면서도 “비중이 점차 확대되면 제품 전 생산 단계에서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혁신 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기업들이 비용 증가 등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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