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미국의 이슬람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진출과 함께 시작됐다. 1492년 이베리아 반도는 781년간의 이슬람 지배를 청산하고 새로운 스페인의 시대를 열었다. 이사벨 1세 여왕의 후원을 받아 인도의 황금과 향신료를 찾아 출항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에는 이슬람 항해사와 경험 많은 선원들이 승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콜럼버스 자신도 이미 신대륙을 탐험했던 무슬림의 기록을 전한 12세기 아랍 지리학자 이드리스의 책을 탐독했다고 전해진다.
콜럼버스 이전 아랍 무슬림들이 신대륙 항해를 감행했다는 주장과 연구들은 당시 지중해 해상권과 동서 해상 실크로드를 장악했던 이슬람 세계의 뛰어난 항해술에 비춰볼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아직은 사료로써 입증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 후 1528년에는 모로코인 무스파파 아젬무리가 난파당해 텍사스의 갈베스톤 해안에 상륙했고, 1539년에는 역시 모로코 출신 무슬림 에스테바니코가 스페인 탐험대의 일원으로 플로리다에 도착해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는 미국 대륙에서 최초로 밀을 경작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콜럼버스 이후 미국의 이슬람은 20세기 중반까지 노예와 쇠사슬의 역사로 얼룩졌다. 17~18세기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장에 아프리카로부터 대규모 흑인 노예가 공급되면서 상당수 아프리카 무슬림이 미국에 터를 잡게 됐다.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1619~1853년 약 250년 동안 10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인이 유럽과 남북미 대륙에 유입됐다. 이들 중 아프리카 무슬림을 20~25% 정도로 추산한다. 알렉스 헤일리의 논픽션 소설 《뿌리》의 주인공인 무슬림 쿤타 킨테가 1767년 메릴랜드주의 아나폴리스에 도착한 것도 노예무역의 결과였다.
19세기 들어 최초의 미국인 개종자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은 저널리스트이자 외교관인 알렉산더 러셀 웹이었다. 그는 필리핀에서 인도 무슬림 지도자의 안내로 1888년 이슬람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국의 아프리카 무슬림 대부분은 노예 신분이어서 서서히 주인의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해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상실했다.
그러다가 20세기가 되자 흑인 무슬림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투쟁과 운동단체가 등장했다. 웰리스 파르드가 세운 이슬람국가단체 NOI가 대표적이었다. NOI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흑인사회의 고통이 극에 달할 무렵 무슬림 흑인 인권운동을 펼치며 ‘당신들은 니그로가 아니라 당당한 인격체며, 흑인의 본래 종교는 이슬람교였다’는 영성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그렇지만 NOI는 백인 미국인을 배척하면서 흑인만의 자유와 정의를 주창하는 흑인분리주의 운동을 제창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 잘 알려진 말콤 X였다. 마틴 루서 킹이 목사로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흑인 해방과 인종차별 철폐, 흑인 인권 신장에 목숨을 바쳤다면, 말콤 X는 이슬람 지도자로 한때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극단적 흑인 우월주의 사상으로 미국 내 흑인과 흑인 무슬림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다. 결국 그는 1965년 2월 뉴욕 집회 도중 총격으로 사망했다.
오늘날 미국 이슬람의 주류는 20세기 이후 팔레스타인, 레바논, 인도, 이란, 파키스탄 등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이민 물결이 몰려들고 유학생이 대거 입국하면서 새롭게 형성됐다. 아직 미국 무슬림은 유대인 공동체의 파워와 영향력에 비하면 존재감이 미미한 수준이다. 이슬람을 바라보는 미국 내 시선도 부정적이다. 이제 그들도 불멸의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에 이어 2명의 여성 하원의원을 배출하면서 미국 사회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미국 이슬람 공동체가 서구와 이슬람 세계의 관계 개선을 위한 교량 역할을 하고 적극적 중재자로 나서줄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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