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연립·다세대 주택(빌라)이 빼곡히 서 있는 서울 은평구 갈현동의 한 비좁은 골목. 결혼한 지 오래되지 않은 20대 신혼 박연아 씨(가명·28)가 이 곳을 네시간 째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혼집을 구하기 위해서다. 박 씨 부부는 전세 보증금으로 1억원을 마련했다. 박 씨는 소기업 계약직을, 남편은 택배일을 하며 모은 돈이다. 많진 않지만 적지도 않은 돈이라고 생각했지만 낡은 다세대 주택 1층 전세도 얻기 어렵다.
박 씨의 전세 매물을 알아봐주던 R공인 중개사는 “작년만 해도 지상층 매물을 구할 수 있었을텐데 요즘은 전세나 월셋값이 워낙 많이 올라 반지하 세도 겨우 얻을 수 있을까 한다”며 “열심히 사는 젊은 신혼부부가 전셋값 상승 때문에 볕도 들지 못하는 곳에 집을 얻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지만 적당한 물건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지난해 전세가격이 급등하면서 저소득층이나 고용 취약계층의 주거의 질이 점차 악화하고 있다. 1년 전 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 도입 이후 수년간 잠잠하던 전셋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탓이다. 셋집을 전전하는 서민들의 고통이 커지고 있지만, 정부는 뚜렷한 대책을 내놓기는 커녕 “전세 불안 가능성이 크지 않다”라는 말만 하고 있다.
서울지역 중개업소들에 따르면 서울 은평구 갈현동이나 강서구 화곡동, 영등포구 대림동, 금천구 가산동 등 소규모 빌라나 오래된 연립 밀집촌의 전셋값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방 수가 1개 이하로 규모가 작거나 반지하나 옥탑 등 거주 요건이 좋지 않은 주택의 전셋값도 몇 개월 사이에 최대 5000만원은 뛰었다.
대림동의 H중개업소 대표는 “최근 전세 보증금 1억6000만원을 들고 온 3인 가족이 방 2개짜리에 화장실을 갖춘 빌라 매물을 찾는 통에 이 일대를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 대표는 “작년 만해도 1억6000만원이면 오래된 빌라를 잘 찾으면 방 3개짜리도 있었다”며 “이주 노동자들이 많이 살아 선호도가 떨어지던 지역에서도 국내 저소득층 젊은이들이 전세 매물을 찾지 못해 난리”라고 덧붙였다.
화곡동의 Y공인 관계자도 “1~2년 전에 투룸에 살던 사람은 원룸으로, 지상층에서 반지하나 옥탑으로 밀려나고 있다고 보면 된다”며 “작년도 전셋값이 많이 올랐다 했지만 올해는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전셋값은 이미 서민가계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크게 오른 상태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 빌라 전셋값은 전달 대비 0.16% 상승했다. 지난해 5월(0.03%)과 비교하면 상승률이 0.13%포인트 높아졌다.
서울 빌라 전셋값 상승세는 지난해 7월 이후 가속화됐다. 지난해 상반기(1~6월)까지만 해도 빌라 전셋값 상승률은 최대 0.09%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지난해 7월(0.12%) 처음으로 0.1%대를 돌파했다. 서울 빌라 전셋값은 2019년 0.20% 하락했지만 지난해에는 1.50% 급등했다.
특히 저소득층의 주거비 부담은 상대적으로 더 커진 것으로 조사된다. 통계청의 연간 지출 가계동향조사 마이크로데이터에 따르면 지난해 전세로 살고 있는 전국 가구의 평균 전세보증금은 1억5789만원으로 전년(1억4862만원)대비 6.2% 증가했다. 이 중 최하 소득계층인 1분위 중 전세로 사는 가구의 올해 1분기 평균 보증금은 8234만원으로 전년 동기대비 6.9% 상승했다. 반면 같은 기간 상위 20%에 해당하는 5분위의 경우 2억5151만원으로 14.1% 내렸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전세난의 원인으로 작년 정부가 내놓은 전·월세 부동산 정책을 꼽는다. 작년 7월 말 “전셋값 급등이 우려된다”는 전문가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 상한제를 도입했다. 결국 전세물건이 급격히 줄면서 저렴한 셋방에서 전세살이를 하던 세입자들부터 밖으로 내몰리는 상황이다.
실제로 빌라 전세 보증금은 몇 개월 만에 1억원 넘게 뛰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동산빌라’ 전용면적 42㎡는 지난 3월 2억9000만원에 전세계약이 체결됐다. 이 빌라는 지난 1월에만 하더라도 1억6800만원에 새 세입자를 찾았다. 기존에 1억원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두달 만에 보증금이 1.7배 뛴 셈이다. 대규모 빌라촌이 형성된 서울 광진구 자양동의 ‘태명’ 전용 47㎡는 지난 1월 3억원에 전세 계약이 체결됐다. 지난해 3월(1억9000만원) 대비 1억원 이상 상승했다.
이처럼 정책적 요인으로 전세난이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는데도 정부의 전세대책은 지지부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신축 매입 약정과 공공전세 등을 통해 올해 상반기 1만가구를 공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4월 말까지 계약 완료된 가구 수는 2300가구에 불과하다. 상반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목표치를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정부는 지난해 11월 전세대책과 올해 2·4 대책을 통해 올해 3만8000가구, 내년 4만2000가구의 단기 주택을 공급하기로 한 바 있다.
은평구 갈현동의 빌라에 보증금 1억2000만원을 주고 전세를 살고 있는 최모 씨(39)는 내년 초 이주를 할 예정이다. 이 빌라는 재개발 사업이 진행 중으로 곧 철거를 앞두고 있다. 최 씨는 "4년 전부터 이 곳에 네 가족이 살고 있다"며 "낡은 집이고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집주인이 이주 때까지 보증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배려해줬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다시 전세를 구하면 지금과 같은 방 세칸짜리 집을 어떻게 구하나 막막하다"며 "뉴스에선 무주택자들에게 집을 살 수 있도록 대출을 늘려주겠다 등 다양한 정책이 나오는 것 같은데 나같이 소득이 낮고 자본도 거의 없는 사람들에겐 딴 나라 이야기일 뿐"이라고 푸념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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