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태 칼럼] 한전, 차라리 상장폐지 하라

입력 2021-07-05 17:25   수정 2021-07-06 11:35

정승일 한국전력 사장은 산업통상자원부 고위공무원 시절 공교롭게 한전 때문에 사표를 쓴 적이 있다. 한전이 추진한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을 놓고 현실화 불가피론을 폈다가 제동이 걸리자 사표를 던지고 집으로 갔다.

그런 정 사장이 이 정부 들어 산업부 차관으로 컴백했다가 한전으로 간 건 아이러니다. 에너지자원실장 시절 전기료 현실화는 그의 소신이었다. 한전은 정부가 대주주이지만 증시에 상장된 시장형 공기업이고, 원가 상승분은 당연히 요금에 반영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 정 사장이 한전에 가자마자 올해 3분기 전기요금을 동결한 것은 더더욱 아이러니다. 본인은 당연히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정부에 그렇게 건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물가 부담’을 핑계로 퇴짜를 놨다. 한국은행의 금리인상 시그널에도 인플레 우려는 없다던 정부다. 선거 앞두고 정권 눈치를 살핀 결정이란 건 삼척동자도 안다.

월성1호기 조기폐쇄 여부를 놓고 실무진에서 가동 연장 보고서를 올리자 장관이 “너 죽을래?”라는 저렴한 언사로 협박하며 정권 뜻에 맞춰 월성1호기 경제성 평가를 뒤엎은 전력을 감안하면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전기료 동결은 시장을 대놓고 무시하는 이 정부의 오만함과 포퓰리즘, ‘내 임기에만 괜찮으면 된다’는 정권이기주의 등이 어우러진 정책 실패의 종합판이라는 점이다.

사실 정권 초기 탈원전을 밀어붙일 때부터 전기료 인상은 불가피했다. 원전의 발전단가는 태양광 풍력 등 다른 에너지원의 절반도 안 된다. 그런데도 탈원전에 부응하느라 단가가 비싼 신재생에너지 도입비중을 늘리면서 한전의 원가부담은 큰 폭으로 늘어났다. 재무구조도 악화돼 부채가 이 정부 들어서만 30조원 가까이 급증했다. 부채비율은 200%에 육박한다. 민간기업이라면 정상적인 채권 발행이 어려운 재무 상태다.

이런 부담을 아는 정부도 한전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올초 연료비연동제를 도입했다. 연료비를 3개월 주기로 전기요금에 반영하자는 취지다. 물론 지켜진 적은 없다. 2분기부터 국제유가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발전도입단가도 오르면서 전기요금 인상 요인이 생겼지만, 정부는 4월 보궐선거를 앞두고 2분기 전기료를 동결하더니 3분기에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전기요금을 동결하면 가계 입장에선 나쁘진 않다. 하지만 인상 요인이 생기는데도 계속 누르면 어떻게 될까. 한전 부채는 눈덩이처럼 쌓이고, 그게 터지는 미래 어느 순간에는 결국 폭탄이 돼 국민에게 돌아온다. 지금 세대의 부담을 미래 세대로 떠넘기는 전형이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건 한전 주주들이다. 소액주주들은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이라도 내지만(사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지분의 30% 이상을 들고 있는 국내 기관과 외국인이 침묵을 지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7.1%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도 주주가치 훼손을 방치하는 건 연금 수급자인 국민들한테 배임이나 다름없다.

한전 주요주주인 몇몇 기관들 얘기를 들어보니 그럴 만도 했다. 한전을 3%가량 보유했던 A기관은 한때 주주제안을 검토했지만 접었다고 했다. 금감원 조사로 보복당할지도 모른다는 압박을 느끼고서다. A기관은 이후 보유지분을 다 정리했다.

외국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정부 정책 리스크가 있는 주식을 굳이 들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때 30%를 넘었던 외국인 지분율이 반토막으로 줄어든 건 당연하다. 한 미국계 운용사 임원은 “증시에 상장돼 있는데도 정부 입김에 따라 주주이익에 반하는 결정이 내려진다는 것은 저개발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정부의 말도 안 되는 개입이 한국 자본시장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국제적인 망신까지 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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